[한국고대사, 끝나지 않은 전쟁 ①] 동북아는 역사전쟁인데…나라 안은 식민사학자들 세상

지금 국사는 왜 내가 어릴 때 배운 국사와 다를까…굴절된 역사 읽는 현실, 광복 70년 역사정립 다시 할 때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다만 항일 가문에서 성장한 한 시민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집안에서 듣던 역사와 다르기 때문에 항상 의문을 가져왔다. ‘대일 항쟁기’에 집안 어른들이 말씀하신 역사를 회고해 보면, 모두 악랄한 일본의 역사 왜곡이었다. 나의 종조부인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선생은 1934년 중국에서 일본 고등계 경찰과 헌병의 수배를 받아 쫓기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 양국의 우리 역사 왜곡에 대하여 저항했다. 당시 중국인 역사학자 황염배(黃炎培)가 ‘조선(朝鮮)’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일본에서 수학한 사람이었기에 완전히 일본 식민사학자의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서술했다. 성재는 이에 분개하여 남모르게 중국 사료를 찾아 ‘감시만어-박황염배지한사관(感時慢語-駁黃炎培之韓史觀)’이란 책을 써서 통박하였다.

 

 

원본보기▲1945년 광복후 귀국을 앞두고 상하이 국제공항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 김구 선생(가운데) 앞에서 태극기를 든 소년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 사진제공 우당 기념사업회
▲1945년 광복후 귀국을 앞두고 상하이 국제공항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 김구 선생(가운데) 앞에서 태극기를 든 소년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 사진제공 우당 기념사업회

 

 

그분들은 독립투쟁은 바로 역사전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성재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놈들의 침략은 역사부터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꿰어 맞추는 데서 시작했다.” 이런 생각은 비단 성재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항일전선에서 싸운 선열들은 모두 공통된 사관으로 무장하였고, 심지어 체포되어 차디찬 옥중에서도 역사를 서술하여 그 원고를 국내 신문에 투고했다. 더욱 놀랄 일은 이런 원고를 받은 신문사가 가혹한 일제 감시에도 불구하고 빠짐없이 이를 게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원고료를 옥중영치금으로 보내서 더욱 용기를 내서 역사 연구를 하도록 격려했다. 이처럼 내외에서 혼연일치가 되어 펼친 ‘우리역사 찾기’ 운동의 불꽃은 ‘우리말 찾기 운동’과 더불어 끊임없이 점화되어 이어왔다. 아마 세계 독립운동사에서 이런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조국이 광복된 지 이제 70년이 지났다고 기뻐하고 있다. 정부 인사들이 각종 행사에서 연설하는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우리는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했던 빈한한 나라에서 이제는 3만 달러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 10위권 대국에 들어서고 있습니다”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자랑하지만 우리 자신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나사가 풀려져 있다. 대일 항쟁기와 비교하면 오늘날은 막대한 연구비와 현대적인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마음껏 역사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대일 항쟁기 선열들이 심혈을 기울여 찾으려 했던 역사의 실마리도 아직 찾지 못하고 일본인들이 만든 가설 위에서 헤매고 있지 않은가? 거액의 예산을 투입하고도 우리 옛 역사의 고지도(古地圖) 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독도를 없는 것처럼 그려내는 그런 무능을 보고 국회에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무리한 일인가? 시민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는 일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 뿐인가? 아직도 일본이 왜곡한 역사에 대하여 올바른 역사로서 대항하지 못하고,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느니, 없었느니”에 대하여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하여 무엇이라 변명할 것인가? 역사학자들이 무능해서 역사 논쟁에 검찰이 끼어들게 만들었다. 지검검사가 학문의 영역이므로 공소 가치가 없다고 결정한 것을 한때 동북아역사재단에 몸 담았다는 고검검사가 다시 관변사학 편을 들어 검찰권을 남용하여 기소하는 이런 이변이 왜 나왔을까? 

 

이런 엄청난 현실을 목도하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침묵을 지키기에는 너무 사태가 위급하다. 더욱이 근래, 강대한 중국까지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전쟁에 뛰어들고 있고, 일본 우익 세력들이 노골적으로 역사를 정치에 종속시켜 서술하고자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소름이 끼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엄중한 역사전쟁이 동북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데 이에 대비해야 할 우리 역사학계는 아직도 관변사학이다, 재야사학이다 갈리고 있다니! 친중파, 친일파로 나뉘어 나라 안에서 지지고 볶다가 나라를 빼앗긴 조선왕조 말기의 재판 아니겠는가? 역사를 전공했다는 학자들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시민에게 정신 차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전쟁에 대비하는 정부가 소홀하다고 탓할 것인가?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그런데 막상 지금 역사책을 찾아 읽어도 그 내용이 우리의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정립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역사책이 은근하게 감추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열등해서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속국이었고 식민지였다(식민사관), 일본의 침략을 나쁘다고만 보지 말고 우리나라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식민지 근대화론), ‘대한민국임시정부’란 한 단체에 불과하고 독립항쟁이란 허깨비 노름일 뿐이다(친일 반민족 역사관)” 식의 굴절된 역사를 읽게 된다면 과연 국민들이 나라를 사랑하게 될까? 혹시나 정부가 잘못된 역사를 국정화된 역사책으로 기술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잘못인가?

 

이제 분명해졌다. 우리 같은 시민이 희망하는 바는 특별한 역사가 아니다. 다른 나라와 같이 국가 주도로 역사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올바른 역사, 우리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서 정리한 역사, 동북아에서 상식이 통하는 공통된 역사, 변조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 간의 올바른 대화가 가능한 그런 역사를 정립하자는 것이다. 

 

 

원본보기▲우당 이회영 선생. 사진제공 우당 기념사업회
▲우당 이회영 선생. 사진제공 우당 기념사업회

 

 

늦었지만 지금은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투쟁 과정에서 싸워왔던 백암 박은식 선생의 혈사(血史),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상고사, 성재 이시영 선생의 민족의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역사를 다시 현대적 역사기술 방법으로 해석하고 증명하는 새로운 정리 작업에 착수해야 할 때다. 평범한 시민 모두는 나라 사랑의 근본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역사를 정립해 달라는 주문을 역사학자들에게 다시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70년 전 해야 할 작업을 이제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다. 사실은 이 작업이 교과서 국정화보다 더욱 중요한 정부의 일이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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