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학과 영성시대후쿠오카 신이치, 「동적평형」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수많은 철학과 과학의 중요한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근대 과학은 기계적인 세계관의 성공에 심취하여 생명도 하나의 기계로 간주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 세기에 들어 분자생물학의 발전은 생명을 너무 단순한 DNA복제 기계로 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후쿠오카 신이치는 그것만으로 생명을 이야기할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 몸 속의 합성과 분해가 어떤 동적인 평형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이 유지되는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 상태의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 즉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무질서도가 극에 달하면 생명이 해체되어 생명체는 죽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은 엔트로피의 증가에 역행하여 질서도를 유지시키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분열하는 시간의 물결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통일의 질서를 동시에 유지시키며 그것을 균형있게 유지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동적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 하였으며, 동적평형이 유지될 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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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신이치, 「동적평형」

- 생명활동이란 아미노산 배열의 헤쳐모여(합성과 분해의 동적인 평형상태가 '살아있다는 것') 

 

 

<섭취한 칼로리는 인풋, 체중 증가는 아웃풋, 인풋과 아웃풋의 관계가 단순한 비례관계, 즉 우향 상승 곡선이라는 것은 우리의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 

 

우리는 생명현상을 너무나도 단순한 '매커니즘'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허점을 생화학자인 루돌프 쇤하이머는 '페니와 껌(penny gum)' 사고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자동판매기에 페니 주화를 넣으면 껌이 나온다. 그렇다면 동전이 껌으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참고로 말하자면 쇤하이머가 이렇게 말한 것은 1930년대였으며 미국에서는 그 때 이미 껌이 나오는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동전이 껌으로 변하지 않듯이 섭취한 단백질 60그램 중 50그램이 소화되고 나머지 10그램이 배출되었다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소화관 안에는 음식으로 섭취한 단백질과 이를 분해하는 소화효소가 거의 같은 양으로, 정신없이 뒤섞여 카오스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소화효소 또한 단백질이므로 최종적으로 소화효소는 자기 자신도 분해한다. 이들은 아미노산이 되어 다시 소화샘으로 흡수된다일단 소화관 속에서 아미노산 단위로까지 분해되면 이것이 원래 음식에서 얻은 단백질이었는지 소화효소였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음식과 함께 우리 자신도 흡수하고 있는 셈이다.  

 

대변으로 배출되는 10그램의 단백질은 이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음식에서 얻은 60그램의 단백질과 70그램의 소화효소가 장렬히 대결을 펼치다 나온 찌꺼기인 것이다. '페니와 껌'처럼 단순히 위로 들어가면 밑으로 나온다는 선형적인 사고로는 생명의 진정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섭취한 칼로리는 인풋, 체중 증가는 아웃풋, 인풋과 아웃풋의 관계가 단순한 비례관계, 즉 우향 상승 곡선이라는 것은 우리의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http://antilibrary.org/589

 

 

.... 쇤하이머는 투입한 아미노산이 쥐의 몸 속에서 연소되면서 에너지로 변하고 연소 된 가스는 호흡이나 소변의 형태로 신속히 배출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표시 된 아미노산은 순식간에 쥐의 온 몸으로 퍼졌고 그 절반 이상이 뇌, 근육, 소화관, 간장, 췌장, 비장, 혈액 등 모든 장기와 조직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미노산을 투입한 사흘동안 쥐의 몸무게는 전혀 늘지 않았다. 이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는 쥐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단백질은 사흘동안 음식을 통해 얻어진 아미노산으로 변환되고 그만큼 몸을 구성하고 있던 단백질은 버려졌다는 걸 뜻한다. 표식 아미노산은 마치 강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흐름'의 존재와 그 속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즉, 이로써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는 조립식 장난감같은 정적인 부품이 아니라, 예외없이 끊임없는 분해와 재구성이라는 활력안에 있다는 획기적인 대발견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는 정말 비유가 아니라, 생명은 흘러가는 강물같은 흐름 가운데 있으며 우리가 계속 먹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 흐름을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분자의 흐름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전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체는 감각적으로는 외계와 격리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이크로 단위에서 보면, 우연히 그 곳에서 밀도가 높아진 분자가 여유롭게 '머무르는'상태에 불과 한 것이다. 생체를 구성하고 있는 분자는 모두 빠른 속도로 분해되며 음식의 형태로 섭취 된 분자로 대체된다. 신체의 모든 조직과 세포의 내부는 이런 식으로 항상 변화하며 새로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몸은 분자적인 실체로 본다면 수개월 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분자는 환경에서부터 와서 한때 머무르면서 우리를 만들어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환경 속으로 분해되어 간다. 즉, 환경은 항상 우리 몸 속을 관통하고 있다. 아니 '관통'이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분자가 '통과할 수 있는' 容器같은 뭔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기서 용기라고 부르고 있는 우리의 몸 자체도 '끊임없이 통과하고 있는' 분자가 일시적으로 형태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흐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변하고 간신히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흐름 자체가 '살아 있다'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쇤하이머는 이 생명의 특이한 현상에 대해 '동적평형'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생명이란 동적인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한가지 중요한 계시가 숨어 있는데, 그것은 가변적이고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특징으로 갖는 생명이란 시스템은 그 물질적인 구조 기반, 즉 구성분자 자체에 의존하는 개 아니라 그 흐름이 유발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즉, 생명현상이란 구조가 아니라'효과'인 것이다.  지속가능하다는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지속 가능한 것은 항상 움직이며 그 움직임은 '흐름', 혹은 환경과의 대순환이라는 고리 안에 있다. 지속 가능성은 흐르면서도 환경과의 사이에서 일정한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평형 상태에 있는 네트워크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대신 다른 부분을 넣거나 국지적으로 속도를 올리는 일은 언뜻 효율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평형계에 부하가 걸리도록 하여 흐름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질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 부분은 각자가 놓여있는 동적인 평형 안에서만 그 의미와 기능을 가지며 기능 단위로 보이는 부분에도 사실 경계선은 없다. 유전자 조작 기술은 기대했던 만큼 농산물 증산에 기여하지 못했고, 장기 이식술은 아직 결정적으로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에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만능세포의 분화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증식을 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며, 기적적으로 만들어 낸 복제양 돌리도 얼마 살지 못했다. 나는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일련의 사례는 생명과학이 과도기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평형계로서의 생명을 기계론적으로 조작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서는 빛나던 것은 언젠가 녹이 슬고, 물은 결국 마르며, 열이 있는 것은 서서히 식어간다. 시간 속에서 이런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과학은 지금까지 사람이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실현 가능하게 했으나, 동시에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돌이키는 일, 즉 자연계에서 사물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이다. 엔트로피란 '난잡함'의 척도이며 '녹슬다' '마르다' '파괴되다' '잃다' '흩어지다' 같은 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질서가 있는 것은 모두 불가피하게 난잡함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며 그 질서는 결국 파괴되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질서'는 '아름다움' 혹은 '시스템'으로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마모되고 산화하며, 실수가 축적되다가 결국에는 장애가 발생한다. 즉 엔트로피는 항상 증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운명을 갖고 있는 생명은 이에 대비해 어떤 준비를 했다.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앞서 자신을 파괴하고 재구축하는 순환 상태, 즉 '동적 평형'인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오랜 세월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과 쫓고 쫓기는동안 조금씩 분자 차원에서 손상이 축적 되다가 결국 엔트로피의 증대에 추월당하고 말았다. 즉,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순간을 반드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체의 죽음이다. 다만, 이때는 이미 순환의 고리가 다음 세대로 바통을 넘겨 준 뒤라 전체적으로 보면 생명활동은 계속된다. 실제로 생명은 이런 방법을 통해 지구상에서 38억년동안 면면히 유지되어 왔다. 그러므로 개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이타적인 존재인 것이다. 생명은 자기라는 개체의 생존에 관해서는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생물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타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치명적으로 질서가 붕괴되기 전에 질서는 다른 개체로 이동하여 초기화된다. 따라서 '살아있다'는 것은 '동적인 평형'을 유지하며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과 타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무분별하게 시간의 흐름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공존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https://blog.naver.com/jsyoum/100104229795 

   

 

 

바이러스는 무생물이다, 왜?

등록 :2008-05-3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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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 사이〉 


“생명이란 동적 평형상태에 있는 흐름”

기계식 자기복제가 기준될 수 없어

슈뢰딩거 등 생명체 규명과정 풀어내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양자역학의 선구자 에어빈 슈뢰딩거(1887~1961)는 1944년에 출간된 자신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렇게 묻는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 “우리 몸은 원자에 비해 왜 이렇게 커야만 하는가?” 

 

슈뢰딩거는 ‘브라운 운동’, ‘확산’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물을 채운 그릇 한쪽 구석에 자주색 과망간산칼륨을 놓아 두면 자주색이 점점 맑은물 쪽으로 퍼져나가 마침내 골고루 분포하게 된다. 과망간산칼륨 입자가 농도가 진한 쪽에서 옅은 쪽으로 움직여가는 것은 각 입자들이 완전히 제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중력 때문에 결국 아래로 처지겠지만 밀폐된 공간 속의 안개나 연기 입자도 비슷하게 움직인다. 물을 채운 네모난 그릇에 미립자 100개를 한쪽 모서리에 놓아두면 미립자들은 물분자와 충돌하면서 불규칙하게 떠돌면서 퍼져나간다. 어느 순간 미립자들 움직임을 연속적인 정지화면으로 본다고 가정하면 대다수 입자들은 농도가 짙은 곳에서 옅은 곳으로 움직여 가지만 그런 패턴에서 벗어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입자들도 발견될 것이다. 평균에서 벗어나 이처럼 예외적으로 움직이는 입자의 빈도는 제곱근 법칙(루트n의 법칙)에 따른다. 100개의 입자라면 루트 100, 곧 10개 정도는 평균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인다. 이는 순전히 통계학적으로 그렇게 관찰됐다는 얘기다. 물리법칙은 다수의 원자운동에 관한 통계학적인 기술이며, 전체를 평균해서 얻을 수 있는 근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100개의 원자로 이뤄진 생명체가 있다고 가정하자. 통계학적 평균(물리법칙)으로, 이 100개 중 10개 정도는 항상 일탈행위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생명체는 늘 10% 오차율의 부정확성을 안게 되는 셈이고, 그것은 고도의 질서를 요구하는 생명활동에는 치명적인 정밀도다. 그런데 원자 100만개로 구성된 생명체가 있다면 일탈적으로 움직이는 원자는 루트100만, 곧 1000개 정도고, 따라서 오차율은 0.1%로 떨어진다. 만일 몇 억개, 또는 사람 몸처럼 수십조가 넘는 원자로 구성된 생명체라면 오차율은 극히 미미해진다. 생명체가 원자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야 생명체가 유지될 수 있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은 최종적으로는 물리학 또는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고실험 차원이었던 그의 예언을 입증한 것은 그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영감을 얻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였다. 그들은 생명체 복제 메커니즘을 이중나선구조로 밝혀냈고 그 본체가 디옥시리보핵산(DNA)이라는 화학물질이라는 걸 규명해냈다.


교토대를 나와 록펠러대와 하버드대 의학부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생명유지장치인 세포벽의 유연한 작동체계를 규명하는 작업에 참여한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 아오야마학원대학 교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은행나무 펴냄)는 이런 쉽지 않은 얘기를 연구자로서의 풍부한 자기 체험을 토대 삼아 이야기하듯 흥미롭게 풀어간다. 


산토리 학예상을 받은 이 책에서 후쿠오카는 복제 여부를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세포의 힘을 빌려 자기복제는 하지만 “생명으로서의 움직임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바이러스를 생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엔트로피(불규칙성, 난잡함) 증대법칙을 거스르고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것은 외부의 질서를 섭취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것을 ‘신체 구성 성분의 동적인 상태’라는 새로운 생명관으로 해명해낸 사람은 루돌프 쇤하이머였다. 쇤하이머는 질소와 수소 동위체를 이용해 몸에 들어온 단백질이 바로 배출되지 않고 몸 전체에 일단 고루 퍼졌다가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질서는 유지되기 위해 끊임없이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디엔에이까지 포함한 생명체의 모든 성분은 끊임없이 새것으로 교체되고 있고, 그것은 “(엔트로피 증대법칙에 따라) 결국은 붕괴하게 될 구성성분을 일부러 미리 분해함으로써, 증대하는 엔트로피를 시스템 외부로 버리는 것”이며, 그런 생명의 동적인 상태가 생명의 실체라는 얘기다. 후쿠오카는 이를 더 확장해 ‘동적 평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생명이란 동적 평형상태에 있는 흐름”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이를 지그소 퍼즐 맞추기 게임에 비유되는 단백질의 형태 상보성 규칙 등으로 설명한다.


후쿠오카 역시 생명활동을 물리·화학 작용이라 보고 있으나, 그것은 생명체를 기계로 간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는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을 끌어들여 생명은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고 처음부터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계와는 다른 것이라며, 녹아웃 마우스(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실험쥐)를 정상에 가깝게 돌려 놓는 생명체 동적 평형의 유연성·적응력·복원력에 경의를 표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