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과 새문명삶과 온생명 - 장회익

본 글은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 교수의 '삶과 온생명'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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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생명 안의 인간의 위상(195)

인간은 온생명 내의 한 개체로서 단순히 온생명에 의존하여 그 생존이나 유지해가는 존재가 아니다. 의식과 지능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은 최초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지니게 된 집합적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이 속한 생명의 전모, 즉 온생명을 파악해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온생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신을 파악하는 존재가 생겨났다는 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온생명은 35억년이란 성장 과정을 거쳐 비로소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것은 바로 온생명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인간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인간은 곧 온생명의 의식 주체로서 온생명 안에서 마치 신체 내에서 중추 신경계가 지니는 것과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는 생명의 역사 전체를 통해 볼 때 생명의 출현만큼이나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인간중심 관점과 온생명 중심 관점(248)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사회를 보는 경우와 온생명 중심의 관점에서 사회를 보는 경우에 현격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먼저 인간을 중심에 둔 시각에서 사회를 본다면 이상적 사회란 “주어진 자연적 여건 아래 인간의 만족스런 생존을 위한 최선의 협동조직”이라고 정의될 수 있겠으며, 이는 사실상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추구해온 이상적인 사회상이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리라 생각된다. 

 

이에 반해 온생명을 중심에 둔 관점에 의하면 이상적인 사회란 “온생명을 구성하는 하나의 하부구조로서 온생명에 속하는 여타 부분과의 긴밀한 조화아래 온생명을 지탱해 나가는 데에 기여함과 동시에 안으로는 구성원들의 안위를 보살펴 나가는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온생명이 곧 나의 생명임을 깨달아야 한다(254)

온생명의 질환에 대처할 긴급한 사항은 온생명으로 하여금 의식을 갖추어 통증을 느끼고 상황에 대비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온생명의 자의식’은 곧 ‘인간의 온생명’ 의식을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인간의식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온생명이 바로 우리의 몸임을, 이것이 바로 나의 생명이며 ‘나’ 자신임을 깨달아 알게되는 일이다.

 

* 의식의 느낌으로의 전환(255)

과학이 온생명 속에 내가 위치함을 보여준다면 내 의식을 이 사실을 느낌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느낌으로의 전환은 나 이외의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주체적 결단이다. 즉, 과학과 주체로서의 나 사이의 진정한 협동작업으로만이 이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 온생명적 관점에서의 삶의 의미(260) 

오직 주어진 유한한 개체적 삶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한층 고차적 기능인 정신활동을 통해 뜻 있는 창조적 삶을 영위하고, 이러한 개체적 삶의 영위를 통해 한층 고차적인 자아, 즉 영속적인 생명인 온생명에 더욱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때 각 개체에 주어진 삶의 기회가 소중하게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 성현들의 직관적 깨달음 경계(286)

특히 흥미로운 점은 온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도움 없이 그 어떤 깊은 직관에 의해 이미 이러한 가치관에 도달한 선례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동서양의 성현들이 이룩한 깨달음과 가르침에는 이러한 가치관의 내용들이 적지 않게 함유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전수해온 심정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설혹 현대와 같은 과학적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전해지는 가르침의 합리적인 내용이 그들의 의지와 감성에 깊은 공명을 일으킬 때 이는 이들의 내적 확신과 의지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 온생명 중심 가치관과 동양적 가치관의 친화성(291-292)

온생명 중심 가치관을 동양적 가치관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놀랍게도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친화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전통사상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흔히 천지라는 말로 개념화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한늘과 땅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붙이들이 삶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삶의 장’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 이 천지 안에는 삶의 원동력이 되는 각종 기가 순환되면서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이 기를 받아 그 어떤 질서, 즉 이(理)에 따른 삶을 영위해가는 것이다. 

 

이때 태극 또는 태극의 이로 대표되는 그 어떤 전체적 가치 아래 각각의 물, 즉 개체들은 그 각각 품수받은 특정한 위상에 따라 이를 나누어 함유하게 되는 것이다. 즉, 동양의 가치체제는 한마디로 이일분수(理一分殊)라 하여 동일한 보편적 가치와 위상에 따라 이를 나누어 지니는 개별적 존재 가치의 체제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물론 생태계라든가 온생명에 해당하는 구체적 체계에 대한 명시적 개념을 설정하지는 않고 있으나 적어도 그 기능적 측면에 관한 한 상당한 직관에 도달했으며 자신들 나름의 개념 체계를 통해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불교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도 사상 또한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붙이의 일체성을 강조하며, 이를 자비라는 심성을 통해 내면화하고 있다. 특히 인도 사상의 브라마(Brama)속에는 온생명과 유사한 개념이 짙게 깔려 있으며 이를 하나의 커다란 그물망으로 이해하는 화엄 사상은 온생명의 생태적 성격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다시 동북아시아 사상으로 승화시킨 원효의 대승기신론과 그 귀명사상에서 개체생명과 온생명 관계에 대한 깊은 직관을 읽을 수 있다.

 

* 생명개념의 무한대적 확장(298)

물론 우리는 생명 개념을 연장하여 전 우주에 연결된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것도 자유이다. 이렇게 전 우주적으로 연장된 생명의 개념이 어쩌면 삶의 더 큰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과학적 논의에서의 유용성을 상실할 것이며, 여기서 제시하는 의미의 온생명과는 다른 개념이 된다.

 

* 온생명을 대하는 대한 필자의 심정(309)

그간 과학의 눈을 거쳐 사물을 보려고 노력해온 필자의 눈에는 ‘온생명’의 정체가 그 무엇 못지않게 선명한 것으로 느껴지며,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할 당위 또한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개체생명의 소중함을 넘어서는 막중한 무게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만일 이 점을 선명한 논의를 통해 분명히 전달하지 못했다면, 최소한 필자 자신의 이러한 체험적 내용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라도 독자에게 분명히 전하고 싶은 것이 현재의 심정이다.

 

 

 

 

서울대 장회익 교수지은 '삶과 온생명' 


중앙일보 1998.08.27 

"사실 어느 면에서는 물리학도 일종의 점 (占) 이다.

 

단지 좀더 신뢰할 만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 (60) 교수의 발언이다.

 

물리학도 본질적으로 미래예측에 관계한다는 말이다.

 

또한 현실문제를 풀어가는 데 '방관자' 가 아님을 뜻하기도 한다.

 

장교수는 국내 과학계에서 독특한 인물로 꼽힌다.

 

실험실이나 강의실에 갇혀 지식을 전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천착하고 또 이를 대중화하는데 각별한 열정을 보여왔다. 특히 올바른 과학문화를 갈구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넘치는데 환경은 나날이 망가지는 시대, 물질과 경쟁은 판치는데 삶에 대한 반성은 실종된 시대를 걱정한다.

 

"엄청난 급류에 휩쓸리듯이 그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배를 타고 불안해하는 정황과 흡사하다" 고. 

 

신간 '삶과 온생명' 은 이런 급류를 헤쳐가려는 사색의 결과다 (솔출판사刊) .논의의 고갱이는 동양 전통사상과 서구 과학문화의 '진정한' 융합. 철학자 박이문 교수 (포항공대) 나 시인 김지하씨도 비슷한 시도에 나섰지만 그는 철두철미 과학자 시각에서 동서양의 지혜를 온축 (蘊蓄)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때문에 인간의 소외를 부른 과학을 폐기하자거나, 동양의 옛 지혜로 돌아가자는 일방적 제안은 그의 책에서 찾기 힘들다.

 

반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궁구한 서양과학, 그리고 학문과 사람다운 삶의 관계를 끊임없이 질문한 동양사상의 '변증법적' 통합을 내세워 설득력이 크다.

 

70년대 이후 서구 신과학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카프라에 대한 비판은 좋은 보기. 동양의 '기 (氣)' 나 불교의 '시공' 개념이 양자이론의 '장 (場)' 이나 '상태' 와 비슷하다고 말한 카프라는 겉만 봤지 속은 알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외형의 유사성을 들어 동서양의 공통점을 주장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해석이라는 생각. 그만큼 저자는 과학적 바탕 위에 단단하게 서 있다.

 

격물치지 (格物致知) 를 내걸고 자연의 규범을 합리적으로 해석했던 성리학 등 동양사상의 과학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사물의 법칙을 언어적 형태나 실험적 방식으로 전개하지 못했던 동양의 취약성을 들춰낸다.

 

동양사상은 현대적 의미의 과학을 잉태하는데 실패했다는 해석이다.

 

나아가 그는 개별.부분적 해석에만 매달리거나 인간의 이익에만 집착한 근대 과학문명의 폐해를 직시한다.

 

자연을 단순한 사물 혹은 사건의 체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통된 삶의 장으로 이해하는 동양의 전통을 슬기롭게 접목하자는 제언이다.

 

그래서 탄생한 개념이 '온생명' . 인간과 자연, 개체와 집단의 이분법적 구분을 떠나 만물은 상호 의존하며 보완한다는, 즉 전체로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설명. 그리고 이 질서를 파괴하려는 현대인의 오만과 물질문명의 무지를 경고한다.

 

신체 각 부위에 번성하는 암세포처럼 온생명의 각 부위를 점유하며 비정상적 번영을 누리는 것이 인간이 아니냐면서….

 

박정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서울대 장회익 교수지은 '삶과 온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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