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되새김모순을 품은 우주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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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을 품은 우주의 진실 

 

역설의 가치 수용하는 상반상성의 논리학…

형식논리학의 범주 벗어난 동양적 사유

 

  

노자는 “바른말은 거꾸로인 것 같다”(正言若反. 78장)고 말한다. 그는 또 “크게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을 더듬는 듯하다”(大辯若訥. 45장)고 말한다. 왜 노자는 바른말이 거꾸로인 것처럼 들린다고 말할까.

 

노자의 논리학은 모순에 대한 해석에서 서양의 형식논리학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은 인간의 사유에서 모순을 몰아내기 위한 논리학이다. “A는 A이다”라는 동일률, “A는 -A가 아니다”라는 모순율, “A도 아니고 -A도 아닌 것은 없다”는 배중률이 형식논리학의 대전제이다.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을 대전제로 삼고 있는 논리학에는 모순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노자의 언어는 일쑤 형식논리학의 대전제를 어기고 있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추함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잘하는 게 잘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 못하는 것일 뿐이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2장)

 

 

패러독스를 바탕으로 짜여진 논리

 

노자의 이 발언을 형식논리학의 기호로 나타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A가 A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A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진술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는 이런 진술이 설 땅이 없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형식논리학과 일치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또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우주의 실상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과 정반대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사실은 추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잘한다고 여기는 것이란 사실은 잘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음을 본다. 노자의 논리는 형식논리학이 몰아내려 한 패러독스를 바탕으로 짜여 있다.

 

형식논리학은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삶에서 늘 이런 역설과 만나며 살아간다. 피부를 잘 가꾸고 뼈를 깎아내고 얼굴을 뜯어고친 뒤 곱게 화장한 미스 코리아의 얼굴을 세상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그런 지나친 꾸밈새가 추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건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것이다. 자기 자식에게 자기가 평생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재산을 물려주는 게 잘하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건 잘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노자는 이런 역설에 오히려 진실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모순은 참된 인식을 위해 몰아내야 할 그릇된 사태이다. 그러나 노자의 논리학에서 모순은 몰아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 끌어안아야 할 사태이다. 

 

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뤄주며, 긺과 짧음은 서로 나타나게 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있도록 하며, 가락과 소리는 서로 어우러지게 하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2장) 형식논리학에서 하나의 사태는 그와 대립하는 사태를 몰아낸다. A는 -A를 몰아낸다. A는 A이지 -A가 아니며, A이면서 -A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의 논리학에서 하나의 사태는 그와 대립하는 사태와 서로 어울려 비로소 존재한다. 있음은 없음으로 인해 있는 것이고, 어려움은 쉬움으로 인해 어려운 것이며, 긴 것은 짧은 것과 상대해서 존재하고, 높음은 낮은 것과 견주어볼 때 높은 것일 뿐이다. 앞과 뒤 또한 마찬가지다. 이처럼 노자가 보기에 인간이 만나는 어떤 사태도 그 대립자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대립하는 사태들은 자기의 대립자를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다. 이렇게 서로 맞서고 있는 사태가 서로의 대립자를 자기 존재의 성립 근거로 삼는 것을 “상반상성”(相反相成)이라고 한다.

 

 

축복과 재앙, 그 뿌리는 서로 통한다

 

<노자>는 상반상성의 사유로 가득하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재앙이여! 축복이 기대고 있는 곳이로다. 축복이여! 재앙이 엎드려 있는 곳이로다.”(禍兮, 福之所倚; 福兮, 禍之所伏. 58장) 형식논리학에서 볼 때 재앙은 재앙이고 축복은 축복이다. 재앙은 축복이 아니며, 축복은 또한 재앙이 아니다. 재앙이면서 축복일 수는 없고, 축복이면서 재앙일 수도 없다. 그러나 노자의 논리에서 재앙은 축복이고 축복은 재앙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옛이야기는 이런 상반상성의 논리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날 변방에 사는 늙은이가 아끼던 준마가 달아난다. 이웃 사람들은 이를 재앙이라고 여겨 노인을 위로하지만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슬퍼할 것 없다. 재앙은 축복의 근원이다.” 얼마 지나 달아났던 준마는 다른 야생마들을 끌고 함께 돌아왔다. 변방의 늙은이네 집은 금세 말 부자가 되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몰려와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며 늙은이를 축하한다. 그러나 변방의 늙은이는 “기뻐할 것 없다. 축복은 재앙의 근원이다”라고 말한다. 머잖아 늙은이의 아들이 야생마 가운데 한 마리를 아껴 매일 타다가 낙상해 다리를 다친다. 이웃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러 찾아오자 늙은이는 다시 같은 반응을 보인다. “슬퍼할 것 없다. 화는 복으로 바뀐다.” 그해 변방 바깥의 오랑캐와 전쟁이 터져 마을의 모든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어갔지만 노인의 아들은 불구자였기 때문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이 고사는 너무도 전형적으로 재앙이 축복으로 전화(轉禍爲福)하며, 축복이 재앙으로 전화(轉福爲禍)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닥친 상황만 가지고 말하자면 재앙은 축복이 아니고 축복은 재앙이 아니지만, 긴 시간을 견딘 삶이 들려주는 지혜의 이야기는 재앙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으며, 축복이 오히려 재앙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자는 “사랑을 받으나 미움을 사나 늘 놀란 듯하라”(寵辱若驚. 13장)고 말한다. 어떤 권력자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하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은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는 일과 같다. 자칫하면 호랑이의 등에서 떨어져 결국은 그의 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자의 미움을 사는 일 또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사랑을 받는 일이나 미움을 사는 일이나 똑같이 놀란 듯 대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재앙에 축복이 숨어 있고, 축복에 재앙이 숨어 있다는 말이 허무주의적인 발언인 것은 아니다. 노자의 이런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유를 예비한 <주역>의 사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점을 쳐서 길한 결과를 얻길 원한다. 그러나 <주역>의 사유는 길함과 흉함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생각하지 않는다. <주역>에서는 아무리 길한 사태라 하더라도 극한에 이르면 다시 흉한 사태로 전화한다. 또한 흉한 점괘라고 해서 끝까지 나쁘지는 않다. 흉한 사태와 만났을 때 사람은 누구나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노력을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주역>의 사유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좋은 점괘를 만났다고 해서 마냥 기뻐하지도 않고, 흉한 점괘를 만났다고 해서 크게 낙담하지도 않는다. 좋은 점괘를 만났을 때는 더욱 삼가고 조심하며, 흉한 점괘를 만났을 때도 역시 삼가고 조심한다. 이런 삶의 태도는 새옹지마와 상반상성의 논리가 말하고 있는 삶의 태도와 일치한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 점을 칠 필요가 없다. 어떤 사태를 만나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천명을 기다릴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자는 “<주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순이야말로 존재의 성립 근거가 된다

 

대개 많은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형식논리학 이외에 다른 논리학이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많은 철학자들은 논리학이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자는 분명 형식논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다. 거기서도 우리는 어떤 사유의 규칙을 찾아볼 수 있다. 형식논리학은 모순을 인간의 사유에서 몰아내려 했지만, 노자의 사유는 모순이야말로 존재의 성립 근거라고 말한다. 크게 양보해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모순을 몰아내는 대신 모순을 끌어안는 상반상성의 사유가 우리의 삶과 우주의 진실을 좀더 핍진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동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상반상성의 사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유해왔다. 그것은 분명 형식논리학과 다른 어법이며, 형식논리학의 교과서에 위치할 자리가 없다. 우리는 이를 일단 ‘상반상성의 논리학’이라고 해두자.

 

형식논리학은 상반상성의 논리학을 포함할 수 없다. 그러나 상반상성의 논리학은 형식논리학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형식논리학은 상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식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상반상성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노자의 생각을 좀더 더듬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