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학과 영성시대신과학칼럼 : 결정론적 세계관의 종말

신과학칼럼 : 결정론적 세계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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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학'이라는 말은 기존의 서양 과학의 인식론에 대한 한계를조망하며 일종의 안티테제(anti-these)로 제출된 일련의 idea를 통칭하는 저널리즘적 용어로, 하나의 정립된 관점이나 입장을 지니지 못 한 채 다만 사고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정도에 머물러있음을 우선 밝혀 둔다.

 

또한 신과학 운동은 1960년대 이후 허무적 new age 운동에 그 영향을 받았음을 간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양 근대 과학 이후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과학에서 조망하고 있는, 혹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목적론적 세계관'으로의 복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살펴 보자.

 

17, 18세기는 물리학과 화학의 시대였다. 천문학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물리학은 뉴튼에 이르러 '우주의 모든 물체는 그 방향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관측하는 우리, 즉 인류는 우주의 운행되는 질서를 완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믿어 의심지 않았다. 

 

또한 화학은 규칙적으로 배열되는 주기율표에서 나타나는_ 백여가지의 원소들이 물질의 본질을 이루는 그 전부이고, 그들이 현상 형태를 바꾸는 과정을 통하여 삼라만상이 이루어져 있다는 확신 속에서, '이제 더 이상의 신비한 질(quality)은 없으며, 다만 양적인 조합과 분리만이 문제시되는데 이것은 조만간 백일항에 드러나게 되리라'는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전세계의 서세동점의 원동력이 되었던 자연과학은, 자본주의의 생산관계가 인류 보편의 생산관계로, 그리고 그 자본주의 또한 국가 독점적 금융 자본으로 질적 변화하게됨으로써 인류의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적 기술쇄신으로부터 전혀 고차의 자연과학으로서의 위상을 요구받게 되었다.

 

20세기의 이른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또한 제 2차 세계 대전으로의 긴박감을 느끼면서 각국이 앞을 다투어 연구하였던 소립자 물리학, 핵 물리학이 그것이다. 이 소립자 물리학은 '양자 역학'으로 그 분과를 규정받으면서, 시기를 거의 같이 하며 출현했던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20세기 전반기의 세계관을 뒤흔들 만한 인식론의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즉, 그들--과학자들--은 '인식의 대상은 인식의 주체와 분리가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인류의 객관적 조망이란 허구에 불과하며, 진리 인식이란 기존의 형식 논리학적 틀 안에서 아무리 관찰, 실험의 정확성을 기하여도 결코 도달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 공간'이라는 객관적, 절대적 좌표축 안에서 관찰하고 실험하던 물질의 운동이라는 것을, '그것은 관찰자 나와의 이러이러한 실험관계를 맺고 있는 저것이며 또한, 절대적인 시공간의 좌표축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며 시공간은 좌표축으로 고정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_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은 여지껏 그들을 지탱해 왔던 '칸트적 우주관'을 전면 폐기해야 할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물질의 궁극을 밝히는 과정에서, 한때 '질은 백팔 원소로 그 전모가 드러났고, 그것의 양적 이합집산만이 문제된다'고 믿어왔던 과학자들이 부딛친 절망이란 더욱 큰 것이었다.

 

원소를 구성하고 있는 양자, 중성자, 원자가 마치 태양계처럼 조화롭게 운행되고 있고, 그들의 숫자 놀이(홀짝 게임)에 의해 다종다양의 화학적 현상이 일어난다고 믿던 그들을 경악하게 했던 _사실은, '원소를 구성하는 소립자는 세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바닥에 있는 원소의 숫자보다도 많고, 그 소립자들의 운동이란 신출귀몰하여 심지어는 한 질에서 다른 질로의 변화까지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질은 없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질의 세계이다!'라는 듯이.

 

 

 

또한 이 양자 역학의 세계라는 곳에서 통용되는 질서는 실로 가관이었다. 이름하여 확률론! 변수만 충족되면 언제든지 해답을 낼 수 있다고 자부하던 결정론자들에 반하여 이 소립자세계의 수학은 가능한 무수한 해를 제공하는 것_이었다. 어느 것이나 해가 될 수 있고 수학적으로는 그 무수한 해가 모두 동등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해가 될 지는 오직 우연! 결정론적 세계관의 맹신론자들은 이쯤에서 완전히 기가 질렸다.

 

우연이라... 이것은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막연한 말이 아닌가? 게다가 열역학에서 제출된 열역학 제2법칙(이른바 엔트로피법칙)의 결과로 제출되는 '모든 것은 흩어져 무로 갈 것이다!!'라는 괴기스러운 예언은 생각만 해도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결정론은 패배하였고, 그 결정론에 대한 회의로서 제출된 것이 바로 우리가 논할 '신과학'이라는 '기묘한' -- 왜냐하면 과학은 언제나 새것이었으니까 -- 말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1960년대를 전후한 '회의론적-신과학'의 전반기를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물론이다. 그 후전개되는 신과학의 새로운 인식은 결코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전까지의 모든 과학중에서 가장 희망적이다(당연하지 않은가, 진보이니까). 모든 것은 진보한다는 그러한 희망, 그러한 목적론적세계관의 재발견, 허무하게만 여겨질 뻔 했던 엔트로피의 놀라운 함의의 재해석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번 글에선 이것을소개해 보고자 한다.

 

[출처 : Hitel 통합과학(phil)동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