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대학 강의]
민족문화의 재인식
- 임재해
민족문화의 가락과 민속문화의 위상
안동대학에서 온 임재해입니다. 오늘 민속과 민족문화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글을 통해서 이 분야에 대해 한두마디씩 이야기를 했지만, 이렇게 포괄적인 주제로 3시간동안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저한테 상당히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의 강연이 서툴고 논리가 서지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널리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시기를 부탁하며, 저한테는 벅찬 주제이지만 주어진 시간 안에 그동안 구상해 왔던 이야기들을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정리들은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보다 실증적이고 기억에 남을 만한 부분들은 구체적이고도 길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민속과 민족문화라고 했지만, 사실 제가 주제를 잡는다면 '우리 민속문화를 통해 본 우리 민족문화의 재인식 또는 재발견'으로 주제를 구체화시켰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선 민족문화라는 것이 한국문화나 전통문화, 또는 민속문화와 어떻게 다른가를 관념적이고 도식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한국문화란 공간적 시간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 있는 동시대(同時代)의 모든 문화를 지칭합니다.
민속과 민족문화의 창조적 재인식
전통문화란 개성있는 문화가 시간적 길이를 가지고 지속될 때, 전통이라는 글자가 앞에 붙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느 대학의 전통이라는 것은, 그 대학에 독특한 개성이 있고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역사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그 대학의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전통문화는 문화적 개성과 역사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에 비해, 민속문화는 상당히 계층적인 용어입니다. 민중적 정서를 중심으로 형성되거나, 또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서 향유되는 전통문화를 민속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속문화를 앞에서 언급한 전통문화와 관계를 지어서 이야기한다면, 민중적 전통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속문화는 민중성과 전통성을 지닌 문화라 하겠습니다. 반면 민족문화는 한국문화 속에 포함되면서, 또 전통문화나 민속문화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전통문화 중에도 민중적 전통문화가 있고, 귀족적 전통문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래문화를 이야기할 때, 민요가 민중적 전통문화에 속한다고 한다면, 가사나 시조 같은 것은 귀족적 전통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민족문화는 우리민족의 삶과 현실에 토대를 둔 전통문화 일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식문화나 수용문화 또는 당대에 창출된 문화를 두루 포괄하는 한국문화와는 달리, 민족문화는 일정한 역사성과 민족적 개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민족 공통체의 삶과 현실 또는 운명 같은 데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이 네가지 문화를 우선 위와 같이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는 민속과 민족문화라는 두 가지 문화 갈래를 논의의 주제로 연결시켜 두었기 때문에, 주로 민중적 전통문화 곧 민속문화를 중심으로 우리민족문화를 새롭게 인식해 보자는 목표를 두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서론적 개념은 대충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실제적으로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우리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고 다른 어떤 글이나 책을 통해서 익히지 못했던, 우리 민족문화의 가치를 크게 두 가지 각도에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는 의식주 문제입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생존하는데 필요한 먹고 입고 자는 이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삶을 보다 풍요롭고 기름지게 하는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민속예술과 관련지어서 우리 민족문화의 특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식문화와 먹거리 이야기
의식주 생활 중에서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습니다만, 먹는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정호경 신부라는 분이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라는 책에서, 밥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밥은 신부보다도 중요하고, 교수보다도 중요하며, 학자나 목사 또는 장관이나 대통령 보다도 중요하다는 그런 이야기 한 대목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밥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밥을 그냥 먹는 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밥을 다른 말로 바꾸면 '먹을거리'입니다. 먹을거리를 그냥 먹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그 먹을거리를 어떻게 먹느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먹을거리를 골라서 어떻게 조리하고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느냐 하는 것이 민족에 따라 다 다릅니다. 그것이 바로 민족문화의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보기를 들기 위해, 여러분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밥을 먹을 때 밥그릇을 밥상에 놓고 먹습니까, 아니면 손에 놓고 받쳐들고 먹습니까? 상에 놓고 먹죠. 더러는 들고 먹는 사람도 있고, 자취하는 학생들은 냄비채로 그냥 들고 먹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우리 민족문화의 문법에 있어서는 밥상 위에 놓고 먹도록 되어있습니다. 혹시 어린아이들이 잘 모르고 밥그릇을 들고 먹거나 들고 돌아다니면서 먹으면, 할아버지가 나무랍니다. 뭐라고 나무랍니까? "이녀석 밥 빌어 먹을래"하면서 비렁뱅이 된다고 나무랍니다. 밥 빌어먹을 녀석이라고 그렇게 주의를 받기 때문에 우리들은 늘 밥상 위에 밥그릇을 놓고 먹습니다. 제가 '식사'라는 말을 잘 안쓰는데, 그것은 식사라는 말이 일본말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어느 기념식에 갔더니 국민학교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교장선생님의 식사가 있겠습니다" 하니까 학생들이 막 웃었습니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의식에 관한 기념의 말을 하겠다는 것인데, 식사는 곧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거기서 혼돈을 일으킨 것입니다. 식사라는 말은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온 이후, 다시말해서 일제시대 때 생긴 말이기 때문에, 저는 '밥 먹으러 가자, 아침 먹으러 가자, 점심 먹으로 가자'등의 말은 하지만, '식사하러 가십시다, 혹은 식사하셨습니까?'라는 말은 가급적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익숙해져서 더러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밥을 먹느냐, 우리와는 반대로 밥을 먹습니다. 밥그릇을 반드시 받쳐들고 먹습니다. 일본아이들이 어릴 때 철없이 밥그릇을 상에 놓고 밥을 먹으면, 일본어른들은 아이보고, "너 이놈, 손도 없느냐? 왜 개처럼 밥공기를 놓고 먹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사람처럼 밥그릇을 들고 먹으면 비렁뱅이가 되고, 일본에서는 한국사람처럼 밥그릇을 놓고 먹으면 개가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민족문화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이런 민족문화가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을까요? 그것은 결코 우연하게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 나름대로의 문화적 사회적 전통과 자연환경의 풍토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전에는 가정학과에서 식품영양학 같은 것만 연구했는데, 요즘은 음식문화까지 연구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런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성과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만히 따져보면서, 음식문화 차이의 원인을 알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밥그릇을 들고 먹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밥그릇이 크게 생겼어요. 밥그릇이 크면 무겁습니다. 또 밥을 푸는데 한 사람이 먹고도 남을 만큼 그득하게 푸지요. 여러분들은 집에서 제사 지낼 때, 부엌에서 어머니가 제삿밥 떠다 놓은 것을 젯상 위에 올려 놓은 적이 있어요? 뜨거워서 못 놓습니다. 금방 퍼서 올려 놓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손 뎁니다. 수건으로 싸서 올려야지요. 그만큼 밥그릇이 크고, 또 밥솥에서 바로 밥그릇으로 옮겨 펐기 때문에 뜨거움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는 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밥그릇을 놓고 먹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작은 밥공기로 덜어서 먹습니다. 미리 양푼 같은 큰 그릇에 밥을 퍼서 밥상 위에 갖다 놓으면, 그것을 각자 작은 밥그릇에 몇 차례씩 덜어 먹습니다. 작은 밥공기이니까 구조적으로 들고 먹기가 쉽습니다. 또 뜨겁지도 않고 가볍습니다. 그리고 밥을 덜어 먹고자 할 때, 밥그릇을 놓고 덜면 불편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들이대고 기능적으로 덜어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큰 밥그릇을 쓰고, 일본인은 작은 밥그릇을 쓸까요? 이것은 뜨겁고 차가운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홋가이도 같은 데는 우리보다 위도상 북쪽이어서 춥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의 중심문화를 이루는 동경 같은 곳은 제주도보다 훨씬 남단입니다. 제주도에서는 겨울에 눈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남방지역인 일본에서는 따뜻한 밥을 먹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겨울에 온돌방에서 구들을 데워서 자는데, 일본에는 구들 즉 온돌이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다다미라는 매트리스를 깔고 겨울을 견딥니다. 일본의 겨울은 불을 지피지 않은 채 지낼 정도로 기후가 온화합니다. 그런 자연환경에 따라서 밥그릇을 들고 먹는 것과 놓고 먹는 방식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밥그릇의 크기도 결정되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변수들이 아주 유기적으로 얽혀져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주로 쓰는 도구가 숟가락입니다. 밥 먹을 때 숟가락을 가장 요긴하게 쓰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 뿐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만하더라도 숟가락은 거의 쓰지 않고, 젓가락을 주로 사용합니다. 일본은 젓가락으로만 밥을 먹습니다. 일본의 숟가락은 음식을 덜 때 사용합니다. 또 그 모양도 우리것과는 다릅니다. 일본의 숟가락은 국물 같은 것을 덜어먹을 때 쓰기 때문에 국자처럼 생겼습니다. 중국의 숟가락도 그렇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숟가락은 그 구조가 아주 얇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서양사람들이 수프 먹을 때 쓰는 숟가락은 아주 오목하고 길죽하며 숟가락 총이 짧습니다. 대만이나 일본의 숟가락은 국물 같은 것을 덜어먹기 위해서 쓰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 오목하고 사기로 되어있으며 또 손잡이 길이가 아주 짧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밥먹을 때 숟가락을 주로 쓰는데, 거기는 젓가락으로 밥을 먹을뿐만 아니라 국물을 먹을 때도 숟가락은 쓰지 않습니다. 생계란을 간장에 풀어서 먹는 것이 일본 식문화의 하나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생계란을 간장에 풀어서 마실 때도 젓가락을 입에 가까이 대고 먹습니다. 왜냐 하면 그릇이 입 가까이 가기 때문에 마시는겸 해서, 젓가락을 사용해 끌어넣어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국물을 먹을 때도 숟가락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숟가락을 씁니다. 왜 그럴까요? 밥그릇을 놓고 먹으니까 그렇습니다. 젓가락으로 밥을 떠 올리면, 밥을 상당히 흘릴 가능성이 있고, 또 따뜻한 온기가 젖가락으로 인해 식어 버립니다. 그러나 숟가락으로 밥을 눌러 팍 퍼서 먹으면, 입 가까이 가는 동안에도 따뜻한 온기가 거의 보존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숟가락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젓가락은 반찬을 집을 때만 사용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밥을 먹는 문화를 일깨워주기 위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를테면 어른들이 수저를 먼저 든 다음에 아랫사람이 수저를 드는 것은 유교적인 상하관계 질서이고, 그보다도 더 원초적인 것으로서,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국이나 장을 먼저 떠 먹고 난 다음에, 밥을 먹어야 한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저는 저의 부친으로부터 '국을 먼저 먹으면 국량(局量)이 늘고 생각하는 품이 는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라국'자가 아닙니다. '사고가 는다', '도량이 는다'는 말입니다. 또 장을 먼저 먹으면, '장력이 쎄어진다', '담력이나 기백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뭔가 그런 기대를 하면서, 이제 국이 있으면 국을 먼저 먹고, 국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장을 먼저 먹은 다음에 밥을 떠 먹게 됩니다. 숟가락으로 바로 밥을 떠 먹으면, "야! 이놈아! 맨입에 밥을 먼저 먹으면 넘어가느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충고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는 숟가락을 먼저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국을 떠먹거나 장을 떠먹을려면, 젖가락으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을 때는 먼저 숟가락을 들어야지, 젓가락을 들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제 숟가락을 들고 밥먹기를 시작합니다. 국을 떠먹고, 그 다음에 밥을 먹은 뒤 숟가락을 밥상에 놓으면 큰일납니다. 숟가락은 국이 있으면 국그릇에 걸쳐 놓아야 하고, 국그릇이 없으면 반드시 밥그릇에 걸쳐 놓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나라의 식사예법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잘모르고, 숟가락을 상 위에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밥먹기 끝'이라는 것을 알리는 하나의 기호체계가 됩니다. 그래서 손님이 숟가락을 상 위에 놓으면, 여자들이 안에서 이렇게 보고있다가 숭늉을 들여오고 밥상을 내가져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밥먹기 시작할 때부터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밥숟가락을 놓으면 안됩니다. 그만큼 숟가락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니까 숟가락을 들어서 밥먹기를 시작하고, 숟가락을 놓음으로써 밥먹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즉 숟가락은 우리 식문화에 있어 중요한 기호체계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고는, 숟가락을 사용해 장이나 국을 떠먹음으로써 소화액을 미리 분비시켜, 마른 밥을 바로 씹어서 넘기는 것보다 따뜻한 국물을 통해 부드럽게 소화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짠맛의 장에는 침샘이 빨리 반응을 하니까 밥을 먹어도 무리없이 받아들이게끔, 장을 먼저 먹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숟가락을 쓰는 것과 밥그릇을 놓고 먹는 것, 큰 밥그릇을 쓰는 것과 기후, 이런 것들이 모두 상호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가정수업 시간에 숟가락을 앞에 놓느냐 젖가락을 앞에 놓느냐는 시험문제가 나오는데, 이런 논리로 생각하면 당연히 숟가락을 앞에 놓아야겠지요. 먼저 사용하는 숟가락을
앞에 그리고 젓가락은 숟가락 다음에 놓아야 합니다. 얼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밥먹는 풍습을 보고, 아주 비위생적이고 비경제적이란 얘기들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식으로 바꾸고자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이른바 주문식단제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밥먹는 문화의 한 특징이 독상차림입니다. 한 상에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충분한 음식이 골고루 놓여져 있는 것이 일상적인 식문화의 문법입니다. 그런데 요즘 음식점에 가보면 국이나 장, 찌개 같은 것을 공동으로 먹잖아요. 여러 사람이 자기 입에 들어갔던 숟가락으로 위의 음식들을 같이 먹으니까 비위생적이라 하는데, 그것은 식당문화가 상업성이라는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나온 말입니다. 장이나 찌개를 함께 먹는 것을 우리의 보편적인 식문화라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손님이나 식구마다 별도로 상을 각각 차려내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된장이든 간장이든 칠첩반상이든간에 독자적으로 자기의 음식을 제각기 먹기 때문에, 우리 식문화가 비위생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우리 민족문화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변질된, 또는 상당히 달라진 면만을 보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밥상은 세계적으로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휴대용(Portable)식 밥상입니다. 이것은 남녀유별의 조선시대 문화와 상당히 관계가 있습니다. 또 우리의 주거문화와도 관계가 있는데, 나중에 집이야기할 때 보충할 기회가 있겠죠. 밥먹는 공간이 사랑방이든 대청이든 안방이든, 이것이 주방과 상당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해서 옮겨 사랑방으로 가면, 사랑방은 그 순간에 식당이 됩니다. 또한 대청이 순간적으로 식당이 되기도 합니다. 서구의 경우, 식당이 따로 있고 거기에 붙박이 식탁이 있어서, 식당이 식당 외의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방의 공간 활용성이 아주 적고, 또 식탁 밑을 청소하기가 불편하는 등 우리의 식문화와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제 큰 잔치를 할 때는 일일이 독상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겸상을 합니다. 그래도 귀한 손님에게는 독상을 차려주는데, 혹시 겸상을 차릴 경우는 겸상을 차려 올려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밥과 고기 같은 것들은 따로 먹지만 다른 음식들은 함께 먹어야 되니까 위생적인 면에 다소 문제가 있겠지만, 그러나 함께 먹는 것들은 전부 짠 음식들입니다. 간장이나 된장 속에 무슨 병균이 옮겨 다닌다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은 독상을 받지 않죠. 할머니나 시어머니들은 독상을 받지만, 아이들이나 부녀자들 그리고 식구들 중 아랫 사람들은 두레상이라고 해서 둥근상에 둘러앉아 함께 먹습니다. 두레상은 요즘 식탁의 규모와 비슷하게 큽니다. 그리고 우리는 입식이 아니라 좌식이라서 앉아서 먹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두레상이 큰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레상도 구조적으로 휴대용처럼 제작되어 있어서, 필요할 때는 접었던 다리를 펴서 음식을 차려먹고, 다먹고 난 다음에는 접어서 시렁 위에 얹던가 농짝 사이에 끼워 넣으면 그것은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붙박이식 식탁과는 다른, 어떤 동(動)적인 밥상이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 관계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식문화는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서 위와 같이 설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식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 일본에 가보니까, 그네들의 식문화가 위생적이고 경제적으로 보여 그대로 모방해 보자는 시도가 한 때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처럼 김밥 두알, 김치 한보시기, 또 뭐 하나 이런 식으로 일일이 따로따로 주문하고 계산하는 것이 경제적이고 위생적이어 좋다고 생각하여, 86년 아시안게임을 전후로 정부에서 행정적으로 모든 식당을 주문식단제로 만들었습니다. 그걸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 있는 식기처럼, 반찬을 조목조목 담는 식기를 만들어 보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주문식단제 하는 곳,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에 맞지않는 것을 그냥 가져와서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가진 정서나 자연환경, 유기적인 질서를 기진 우리 식문화 등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생활은 상당히 바뀌었습니다. 아파트생활을 한다든지, 남녀차별관념이 없어졌다든지, 또는 부엌에 가서 설겆이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남성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 민족문화의 하나인 식문화를 현실에 맞게 새롭게 정립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통적 계승을 지닌 민족문화로서의 우리 식문화는 일정한 전형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민족문화의 전통과 개성을 알았으면, 우리는 이제 우리 문화와 타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밥그릇을 놓고 먹는데, 일본사람들은 들고 먹는다 해서 일본사람들을 비렁뱅이라고, 밥먹는 것부터 틀려먹었다고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일본사람들도 반대로, 우리들에게 개처럼 밥을 먹는다고 이야기를 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말할 경우, 민족문화는 자칫 국수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국수주의에서 더 나아가면 제국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차이점을 짚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문화만 가장 우월하고 바람직하고, 다른나라 문화는 상대적으로 후지고 뒤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국수주의입니다. 자국 문화중심주의지요. 그것이 제국주의로 발전하면 자기의 민족문화만 남아야 하고, 다른 민족문화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밥그릇을 밥상 위에 놓고 먹는 것이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과 개성에 맞는 것처럼, 일본사람은 들고 먹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다른 것'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민족주의입니다.
저는 민속학 중에서도 옛날 이야기를 주로 전공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곧 '틀린 것'으로 여겨 문제가 된 옛날 이야기를 하나 든다면,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안동지방의 어느 양반이 일제시대 때 도저히 안동에서 살 수가 없어서 만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민인지 뭔지 좌우간 그 때 만주로 간 사람 참 많았습니다. 제 친척들 중에서도 갔다가 못돌아온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다쳐서 흉터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평안북도 신의주 근처의 선천까지 갔어요. 가족들을 거느리며 민박을 하면서 갔습니다. 어느 집에서 민박을 하는데, 자기는 사랑방에 있었고 아이들과 아내는 안방에 있었습니다. 사랑방에서 밥상을 받아 밥을 먹고 있는데, 그 선천지방의 바깥 주인이 자기 아내를 보고 "오마이"라고 그래요. "오마이, 밥상 물러 가시오" 라고 하는데, 호칭이 '오마이'였습니다. 그 집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부르는데도 '오마이' 혹은 '오마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동 양반은, '참으로 이상하다. 어떻게 자기 아내를 부를 때 아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과 같이 부르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말해서,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고 안동 양반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민박을 하고 있는 처지에 따질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잤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떠날 무렵, '모른 체하고 그냥 가는 것은 안동 양반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이 사람들이 호칭을 잘못알고 있기 때문에 가르쳐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주인장을 불렀어요. "주인장!" "왜그러시오?" "당신은 당신 아내를 부를 때 어떻게 부르시오?" "아니 뭐, 오마이라고 부르죠. 당신 듣지 않았소?" "그럼 당신 어머니를 부를 때, 당신은 어떻게 부르시오?" "아! 역시 오마이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안동 양반이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리 부인이 귀엽고 사랑스럽기로서니 모친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자기 아내에게 쓸 수 있소? 당신 그것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 이야기를 듣고서 주인장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역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동안 한번도 따져보지 않았던 문제였고, 쭉 자기 선조때부터 자기 마을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왔으니까 자기도 그렇게 불렀을 뿐, 호칭을 의심해 볼 여지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안동 양반이 그렇게 따지고 드니까 이상하단 말이죠. 그래서 주인장이 안동 양반에게 물었습니다.
"아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러면 안동 양반 당신은 당신 아내를 어떻게 부르시오?" 그러니까 안동 양반이, "우리야 뭐 할마이라고 그러지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안동 사람들은 부인보고 '할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주인장이 더 깜짝 놀라는 거예요. "아니, 내가 모친의 호칭을 쓴다고 나무라면서 어떻게 당신은 모친보다 더 높은 조모의 호칭을 부인에게 쓸 수 있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문화의 차이입니다. 크게 민족적인 문화의 차이가 있는가 하면, 작게는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고, 더 좁게는 지역 안에서도 고을과 마을에 따라서, 집안에 따라서 문화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인정해야 평화와 자유, 또한 민족간의 유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틀린 것이나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인류의 불행은 끝없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나하고 피부 색깔이 다르므로, '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종노릇을 해야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흑백문제가 아닙니까? 또 '당신은 나하고 종교가 다르다. 그러므로 당신은 잘못되었고 틀렸다. 그러므로 없어져야 한다', 이런 것이 십자군 전쟁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 전쟁이나 인종차별 등과 같은 불행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문화를 이해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또 지역문화를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지역문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타지역이 가진 개성이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이지, 자기지역문화만이 최고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요즘 문제되는 것이 지역감정인데, 지역감정은 줄일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지역의식은 높일수록 좋습니다.
지역감정과 지역의식의 논리를 민족감정과 민족의식의 논리로 바꿔놓아도 성립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식민지배를 기도한 일본을 감정적으로 적대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민족감정은 없앨수록 좋지만 민족의식은 높일수록 좋은 까닭입니다. 민족감정은 자칫하면 타민족의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여 민족간의 갈등과 다툼을 확대생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마을 동제 지내는 풍속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전승할 만한 것이듯이, 이웃마을의 동제 지내는 방식이 우리와 달라도 우리는 그 독자적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복의 융통성과 입을거리 이야기
제가 먹는 이야기를 하면서 문화일반론까지 너무 확대한 것 같은데, 먹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의 의생활과 주생활에 관해서도 조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지금 양복차림이지만, 우리의 옷인 한복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맞지 않고 우리가 입지 않는다 하더라도,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서고 있으며, 또 요즘 여름철에 모시옷을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젊은 사람들도 가끔씩 보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향해 가려고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힘들고 되살리기 어렵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옷감도 더 비싸고 옷 만들기도 옷 구하기도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당장 한복을 입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복에 담겨있는 가치마저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즘 서구문화권에서 다시 회귀하려는 경향이 여러 곳에서 두루 보입니다. 오늘 이 모임도 그런 모임 중의 하나일 겁니다. 이런 경향을 고려해 볼 때, 지금 우리가 입지 않을 것 같고, 살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무시해도 좋을 것 같아 보이는 한복이나 한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집자랑 대회를 한다고 합시다. 그 때 우리가 63빌딩을 내놓고 집자랑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내놓는다면 예선에도 못들어 갈 겁니다. 63빌딩보다 갑절이나 높고 규모가 큰 건물들이 이미 오래 전에 세계적으로 많이 지어졌습니다. 우리의 집으로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옥입니다. 초가집이든 기와집이든 상관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옷 대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앙드레 김이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그래도 세계에 우리의 옷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그런 옷이 아니라, 에드윈이니 요새 뭐 뱅뱅이니 그런 옷이 아니라, 바로 한복입니다.
한복의 치마를 한번 봅시다. 꼬리치마 같은 것을 보면, 치마를 벗어서 들면 끈이 달려있는 주름커텐 같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다용도로 쓰여지는지 그 기능적인 면을 살펴 봅시다. 우선 서양의 스커트나 양복 같은 옷은 갈무리할 때, 그 옷의 모양에 맞는 옷걸이가 있어야 합니다. 옷장 안에서 다른 옷과 겹쳐지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옷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걸어두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치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또르르 말아서, 아무데나 걸면 됩니다. 또는 착착 접어서, 옷장 안에 넣어도 관계없습니다. 필요시 털어서 입으면 처음에는 조금 구겨져 있다가도 곧 원상태로 회복되어, 사람의 몸매에 맞는 모양을 이루게 됩니다. 보관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치마의 다양한 기능을 한번 볼까요. 일하러 갔을 때는 치마가 그릇 구실을 합니다. 가령 고추따러 갔을 때, 고추를 담아 다래끼로 옮길 때 쓰이는 그릇 구실을 합니다. 일종의 보자기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나물 캐러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치마는 수건 구실도 합니다. 아이들이 울거나 할 때, "아이고 이녀석아, 나를 그렇게 찾았냐. 엄마가 밭에 일하는데 뭐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냐" 하고는 치마를 뒤집어서 눈물 콧물을 닦아줍니다. 치마는 이처럼 무엇을 닦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웃집의 아이와 같이 나들이갔는데 아이가 잠이 들었어요. 옛날에 애들은 제대로 안입고 다니잖아요. 그럴 때 치마를 벗어서 덮어주면 이불이 됩니다. 심지어 나물노래 같은 걸 보면, 산에 나무하러 갔던 총각과 나물캐러 갔던 처녀가 만나서 사랑을 할 때, 치마가 깔개가 되기도 하고 차일이 되기도 합니다. 여름에 아이들이 바깥에서 잠들면 해를 가려주는 차일 구실도 하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커튼 구실도 하는 등 치마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입던 꼬리치마를 딸이 입는다고 할 때, 품이 맞지 않아서 못입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감는 것이기 때문에, 품이 크면 조금 더 많이 감으면 됩니다. 품이 작으면 적게 감으면 해결됩니다. 그러니까 겹치는 부분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품이 변하기 때문에, 품의 크기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또 치마의 길이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큰 치마를 입을 때는 말기를 몇번해서 입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남성들이 입는 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지도 옷주름을 많이 접으면 품이 대충 맞아지고, 또 길면 위로 말아올리면 됩니다. 아주 융통성있게 되어있습니다. 남자 옷까지 이야기하면 길어지니까, 여자 옷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쟁이라는 여자용 속옷이 있습니다. 요즘에 순면제품이 인기있는 것처럼, 옛날의 고쟁이도 물론 순면제품이었습니다. 여자들의 속옷인 고쟁이의 구조를 보면, 대소변을 보기 위해서 앉을 때는 밑이 자동으로 열릴 수 있도록 되어있고, 볼일을 보고서 일어서면 자동으로 닫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남자들의 속옷 앞쪽에 소변을 서서 볼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놓은 속옷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특허가 되어서, 그것을 발명한 기업이 굉장히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옛날에 이미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실생활에 기능적으로 써 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속옷은 겹치는 부분이 굉장히 두꺼웠습니다. 여자들 내의든 남자들 내의든 중요한 부분에는 천이 두꺼워야 했습니다. 필요할 때는 알궁둥이가 나올 정도로 열리고, 그렇지 않을 때는 두껍게 겹쳐지면서 완전히 가릴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여자들 하의를 여닫는 단추가, 옛날에는 뒤쪽에 있었다가, 다음에는 옆쪽으로 갔다가, 요즘에는 앞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바뀌는 현상들과 여자들의 속옷 구조나 치마를 한번 보세요. 요즘 얇은 천 하나 걸쳐입고서 패션쇼 한다고 나오는 것과 우리의 꼬리치마를 비교해 볼 때, 마치 탈춤에서 마당극이 나오듯이, 한복의 그러한 논리에서 현대문화에 맞는 새로운 옷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의 저고리 같은 것을 보면, 소매가 길고 곡선으로 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저고리 같은 경우, 별도의 호주머니를 만들지 않아도 간단한 소지품들을 넣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이 아주 큰 남자들 바지의 경우, 위에서 졸이고 밑에서 대님까지 졸이면, 품이 아주 넓어집니다. 이것은 온돌방에서 좌식생활을 하는데 아주 기능적일뿐 아니라, 공기를 많이 함유할 수 있어서 보온을 유지하는 데도 상당히 기능적입니다. 따뜻한 음식을 즐겨찾듯이 따뜻한 옷을 입기 위해서 마련된 양식이 대님입니다. 제가 복식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한옥의 장점과 집 이야기
온돌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음은 집을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집의 재료 중에서 한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집의 재료들은 흙과 나무와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부 자연적인 것으로 이루어졌지요. 오늘날의 콘크리트 같은 화학재료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해와 오염의 염려가 없습니다. 한옥을 헐어낸 집터는 생생하게 살아있지만, 콘크리트로 지은 집을 헐어내고 거기에 무엇을 심으면 자라질 않습니다. 땅이 오염되어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콘크리트를 금방 바른 폐쇄된 집 안에서 잠을 자면 질식해 죽습니다. 피부가 민감한 사람이 콘크리트 이긴 것을 손으로 만지면 손이 부러틉니다. 그만큼 콘크리트는 독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축아파트에 들어간 새댁이 얼마 가지 않아 시들시들해지는 이유는, 콘크리트 같은 비자연적인 재료가 지닌 독성과 밀폐된 공간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우리 집의 재료 중의 하나인 창호지 또는 문종이라고도 하는 한지(韓紙)를 예로 들면, 한지는 세계 종이박람회에 나가서 일등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지는 무엇이든지 반 정도를 투과시키는 반투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도 반, 공기도 반투과시킵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이 만든 유리는 빛은 전부 투과하고, 공기는 전부 차단합니다. 바깥을 말끔히 내다볼 수 있는 대신, 유리창으로 차단된 상태에서는 소리를 질러도 전달되질 않습니다. 공기가 통과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유리를 창문의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는 빛이 완전히 통과되기 때문에 반드시 커튼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아파트인 경우, 밤에 커튼을 치지 않고 불을 켜놓으면, 맞은편 아파트에서 거실의 풍경을 다 들여다 보게 됩니다. 또 창문이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공기가 전혀 투과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환기장치가 별도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기창을 별도로 만들고 가습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지는 빛을 반 정도만 투과하기에, 아침에 밝아오는 빛이 창호지를 통해서 방안을 은은하게 비춥니다. 저녁에 호롱불을 켰을 때는, 밖에서는 방안의 동정을 불빛으로 생긴 은은한 그림자로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짐작할 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영화 같은 걸 보면, 남녀의 첫날밤이나 침실에 드는 장면을 문에 비치는 그림자로서 알 수 있게 합니다. 서로 껴안고 쓰러지는 장면을 문에 비치는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호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유리문은 햇빛이나 불빛을 그대로 통과시키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커튼을 치거나 블라인더로 빛을 가려야 합니다. 하지만 한지문은 빛을 직접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시설물없이 방안을 자연조명으로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호지는 습한 날에는 흙이나 나무처럼 습기를 많이 빨아들입니다. 날씨가 건조하면 이번엔 반대로 습기를 내뿜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흙과 나무와 한지는 자동으로 습도를 조절합니다. 그리고 바깥공기와 방안의 공기를 계속해서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공기창을 내지 않아도 되고, 또 가습기와 같은 별도의 장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옥의 구조를 기능적으로 얘기한다면, 아까 밥상을 들고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들은 가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역동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양옥처럼 응접실, 침실, 서재, 식당 등이 제각기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방 하나가 필요에 따라 다양한 구실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손님이 왔을 때 방석을 내놓으면 응접실이 됩니다. 서안(書案)이라는 책을 읽는 밥상 비슷한 탁자가 있는데, 그것을 펴고 책을 읽으면 서재가 됩니다. 밥상이나 주안상이 들어오면 식당방이 됩니다. 또 밤에 잘 때 이부자리를 펴면 그 방은 침실이 됩니다. 거기서 바느질을 한다거나 새끼를 꼰다거나 가마니를 짠다면 일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칸방에 살아도 생활에 그렇게 큰 불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방에는 아버지께서 거처하고, 안방에는 어머니나 할머니께서 거처하고, 상방에는 새며느리나 새로 장가간 아들들이 거처하면서도, 각 방들은 구조적인 가변성을 지니고 있어서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느 집에 가보니까 침대를 들여 놓았는데, 거실에 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방문을 반쯤 열어놓아 더블베드가 보였습니다. 서양사람들은 침실을 공개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 침실은 주야로 마련되어 있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잠자리는 남한테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환자가 있을 때는 낮에 자리를 깔아줍니다. 밤에도 가족끼리 있을 때만 잠자리를 폅니다. 서양 잠자리인 침대는 일정한 방의 면적을 고정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침실 외의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침대 밑은 청소하기도 힘듭니다. 카페트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게 불편합니다. 서양영화를 보면, 여자와 남자가 잠자리에 들어가서 '니 좋다'하며 옷을 벗을 때, 마지막으로 여자들은 하이힐을 벗고, 남자들은 워커를 벗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침실까지 신을 신고 들어가기 때문에 신발에 묻은 흙먼지를 제거하기 위해서 카펫트가 있어야 합니다. 카펫트가 있으니까 진공청소기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방안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여러모로 실외에서 묻은 흙먼지들을 차단합니다. 마당에서 댓돌 위로 올라갈 때, 신발에 묻은 흙먼지들이 먼저 한번 제거됩니다. 댓돌 위에서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면 마루 위에 문턱이 있습니다. 문지방이라고도 하는 문턱을 넘어서 들어가면 이제 장판바닥입니다. 그러니까 알몸으로 엉덩이를 방바닥에 대고 앉거나, 요없이 그냥 드러누워도, 거기에는 위생적으로 아무런 불결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장판바닥을 항상 물걸레로 닦아 청소하니까, 방안이 말끔하고 청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우리 유학생들은 화장실의 수도가 고장나도 수리공을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학생들은 한국식으로 문간에서 신발을 벗고, 안에서는 맨발로 다니거나 슬리퍼를 신는데, 그녀석들은 신을 신은 채로 들어와 거실이고 뭐고 마구 돌아다니니까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이러한 것들이 우리나라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주거생활의 개성 혹은 장점들입니다. 저희 대학이 미국의 어느 작은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서, 그 대학의 교수 한 분이 우리 대학에서 한학기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문학 전공하는 몰리 교수였는데, 그 분이 자는 곳이 안동문화회관이었습니다. 거기서 그 분과 만나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녀가 하는 말이, "여기는 집구조가 이상해요. 난방시설이 왜 보이지 않죠" 하고 물어왔습니다. "우린 난방시설이 바닥 밑으로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몰리 교수는, 왜 그 밑으로 넣어 놓았는냐, 고장나면 어떻게 고칠려고 밑으로 넣어 놓았느냐, 라디에타를 벽의 측면에 세워두어야 고장날 경우에 손쉽게 고칠 것 아니냐 하며 다시 반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온돌시스템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온돌이란 라디에타를 옆에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방구둘 밑으로 깔아놓은 것이라는 얘기부터 시작해서, 온돌을 우리의 전통문화와 관계를 지으면서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여러가지로 설명해 주었더니, 마침내 납득을 하였습니다. 우선 우리의 난방 전통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온돌전통,즉 방구둘을 데우는 전통입니다. 밑바닥을 데우는 것입니다. 불을 때면서 취사와 난방을 함께 합니다. 요즘은 가스렌지가 있어 취사를 별도로 하고, 난방용 보일러도 따로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열낭비요 에너지 낭비지입니다. 지금 에너지를 아낀다고 많은 정책을 쓰고 있지만, 사실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라디에타는 공간활용에 있어서도 굉장히 불편합니다. 라디에타가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가정집에서는 가구를 들여놓을 때, 라디에타는 방해물이 됩니다. 또 초창기에 지은 아파트 같은 경우는 라디에타가 거실에 설치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놀다가 넘어져 부딪치면 큰 부상을 당할 염려도 있었습니다. 라디에타는 벽 옆에 세워져 있지만, 라디에타로 연결되는 관은 벽이나 방바닥을 통과하며 서로 얽혀 있습니다. 라디에타 배관이 고장날 경우 수리하는 방법은 온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디에타를 방구둘 밑으로 놓는 것이 공간활용이 좋아 좌식생활을 하는데 아주 기능적입니다. 또 대류현상을 고려해 볼 때, 온돌처럼 밑면 난방방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방구둘을 직접 데우는 온돌 문화는 결국 서양의 스팀이 들어오면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보일러로 대체되었습니다.
맨 처음 라디에타가 들어왔을 때, 라디에타를 만든 고장의 입식문화처럼, 라디에타가 벽의 측면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서양의 가옥구조에서 난방구실을 하는 벽난로가 벽의 측면에 붙어 있어서, 한국으로 들어온 난방시스템도 그와 같이 벽 옆에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 설치된 난방시설은 우리 처지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밑면난방의 온돌처럼 라디에타가 전부 방바닥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라디에타가 방 밑에 설치되어 보이질 않으니까, 그만큼 공간활용면에 있어서 유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온돌식보일러 설치법이 미국의 새로운 공법으로 되어서, 이제 미국에서는 라디에타가 한국의 주거문화 형태처럼 방바닥 밑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전기담요를 가장 먼저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면, 세계에서 전기장판을 가장 먼저 만든 나라는 물어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입니다. 온돌과 같은 밑면난방 방식을 취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결코 전기장판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때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기제품으로 유일하게 사가지고 가는 것이 전기장판이었습니다.
방구둘을 데우는 한국의 주거문화로서, 한국인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밀항을 더러 했는데, 일본경찰이 밀항자를 잡아내기 위해서 부두가에 모닥불을 피웁니다. 겨울에 모닥불을 피우면 사람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서서 불을 쬐지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한참 쬐다가 반드시 뒤로 돌아서 등과 엉덩이를 쬡니다. 온돌에 누워 자서 허리를 따뜻하게 해 온 버릇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경들은 그런 사람을 밀항자라고 생각하여 붙잡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화의 차이입니다. 요즘 주거문화가 많이 바뀌어 소파가 들어오고 의자생활을 하다 보니까, 제 주변에서는 척추디스크를 앓는 사람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따뜻한 온돌에 허리를 대고 자던 사람들은, 하루종일 모내기하고 장작패고 나무하고 지게를 져서 허리가 아파도, 자고 일어나면 다 풀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온돌방생활에서 침대생활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침대는 스프링의 탄력에 의해서 곡선으로 휘어집니다. 의자도 서양 것을 대충 흉내내어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척추구조와 구조적으로 잘 맞지 않습니다. 소파도 서양사람들의 신체구조에 맞게끔 크게 만들어져 나옵니다. 소파에 앉을 때는 등받이등을 딱 대고 직각으로 앉아야 되는데, 우리는 궁둥이를 대고 직각으로 앉으면 무릎이 짧아서 다리를 자연스레 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파에 앉으려 하면 허리가 굽어져야 됩니다. 따라서 척추도 굽어버립니다. 척추가 굽으면, 척추가 약해져서 디스크에 걸리게 됩니다. 주거생활의 변화로 인하여 전에는 흔하지 않던 병이 생겨난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