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 속의 신바람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6-19 00:20:22    조회: 2,00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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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대학 강의]

 

민족문화 속의 신바람 

 

임재해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민속문화 속의 신바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얘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먼저 '신바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신바람은 풀어쓰면 신의 바람 즉, 신기(神氣)의 움직임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우리가 바람(風)을 '공기의 이동'이라고 정의하듯이, 신바람은 신기의 흐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기'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두루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저사람, 끼가 있다' 혹은 '신기가 있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끼 신기'라는 보이지 않는 현상이 시각이나 촉각으로 감지될 수 있을 만큼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활성화된 것을 신바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한자로는 신명(神明)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의 나타남, 즉 신기가 우리들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밝게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신명 신바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기란 누구든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잠재된 신기가 어떠한 자극이나 동기에 의해 활성화되면, 바람으로 혹은 밝음으로 우리가 감지할 수 있게 되어 '신명이다', '신바람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됩니다.

 

 

 

신바람은 언제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그러면 신명이나 신바람은 어느 때에 나타날까요? 여러분들도 '신 지핀다', '신 내린다', '신 들린다' 등의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즉 지피고, 내리고, 들려서 신바람이 나타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은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고 사람의 몸에 실리어 나타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신이 몸에 실리어 그것이 바람으로 혹은 밝음으로 나타날 때, 신기가 우리 몸을 통해 뚜렷하게 구현되는 그 때가 바로 신과 인간이 합일된 것입니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의 한 예로 신 지핀 현상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신 지핀다'는 것은 몸 속에 내재하는 신기와 외재적인 신명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핀다'는 것은 흔히 '불을 지핀다'라고 할 때처럼 불쏘시개에 불을 붙여서 큰 불을 피우듯이, 우리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기가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어 신명 신바람이라는 보다 큰 불을 피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신내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보다 위에 있는 신이 인간의 몸에 하강하여 접신(接神)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을굿과 같은 큰 굿을 보면 흔들림이 좋은 대나무나 소나무로 만든 긴 장대에 방울을 달아서 그 흔들림으로 신내림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기도 하고, 방울소리를 통해 청각적으로 확인하기도 합니다. 신내림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간절한 바램으로 자신이 원해서 주체적으로 접신하는 경우와, 신들린 무당의 경우처럼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내림이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당이 되는 과정 중에는 무병(巫病)이라는 단계가 있는데, 신을 받아들이는 내림굿을 하지 않으면 그 병이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내림굿을 해야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병을 꺾을 때 신내림 현상이 나타나고, 확실하게 내림굿을 하고 나면 병의 증세가 말끔하게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신이 제대로 내린 까닭이지요.

 

이렇게 신이 내리게 되면 초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떡시루를 이빨로 물어서 든다든가 시퍼런 작두날 위를 서슴없이 걷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신바람 신명이 발휘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명 신바람이 무당들에게서만 나타나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우리 몸 속에는 누구나 다 신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들림이나 신내림 없이도 신바람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술가들은 신기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 속에 내재해 있는 신기가 외부적인 자극으로 무엇인가 표현하고 싶은 의지와 만나게 되면 멋진 춤을 추게 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됩니다. 일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일하는 중에 신기가 나타나서 미친듯이 일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부하는데 신기가 발휘되어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무엇으로 나타날 여지도 충분합니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역량과 의지에 따라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분야에서 신바람이 나서 일이든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정신없이 하게 되면,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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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을 풀어내는 것이 곧 신바람

 

신바람은 어떤 상황, 어떤 때에 잘 발휘될까요? 그것은 어떠한 자극이 있을 때 잘 나타납니다. 교육이나 도덕, 규범에 의해서는 잘 자극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갖고있는 신기를 억압하고 속박하여 신바람이 발휘될 수 없게 할 뿐입니다. 그런 규범이나 교육, 도덕에서 벗어나 우리가 갖고있는 생명본성, 본디부터 타고난 자유로운 천성 자체를 활성화하면 신기가 역동적으로 움직여서 신바람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럴려면 무엇보다 자유로워야 하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곳 강연장에서 강의를 듣고있는, 교육을 받고있는 입장에 있는 여러분들은 신바람이 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강의가 끝나서 뒤풀이라는 자유로운 자리가 되면, 잠재적인 신기가 서서히 활성화됩니다. 물론 외재적인 신기가 들어와서 교육이나 도덕, 규범에 의해 갇혀있던 신기를 해방시켜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른바 신명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신명을 풀어내는 것이 곧 신바람입니다. 가령 강의를 하는 저와 여러분 사이에 신기의 교감이 일어나면 상승작용을 하여 저도 신바람나게 강의를 하고 여러분도 재미나게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상대방과 신기가 교감할 때, 정서가 일치할 때, 그리고 공감력이 확산될 때, 의식이나 운동이 집단화되어서 신바람이 한층 대규모화하여 상상할 수 없는 큰 위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신바람은 가락 또는 리듬이 있을 때 더 잘 납니다. 혼자서 이야기를 하면 정신나간 사람이란 소리를 듣지만, 혼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저사람 뭔가 신나는 일이 있나 봐' 하는 말을 듣습니다. 또 춤을 출 때도 가락이 없으면 동작이 부자연스럽지만, 가락이 있으면 그 춤은 절로 흥이 나게 됩니다. 

 

또 같은 서사적 이야기라도 판소리에는 가락과 리듬이 있는 까닭에,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바람을 자극하는 추임새를 이끌어내고, 때로는 박장대소하게도 하고, 때로는 눈물짓게도 만듭니다. 바로 음악적 가락이 우리의 내재적인 신기를 자극하여 신바람이 나게 하는 것입니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지신밟기를 하며 풍물을 치는 것도 신바람을 일으키고 신명을 자극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가락이 왜 우리를 신명나게 하는 걸까요? 우리 몸에는 음악적 가락, 즉 일정한 리듬이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뇌파가 나오는 등등 모든 것에 리듬이 있습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데도 일정한 리듬이 있고,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도 일종의 리듬입니다. 이러한 우리 몸 속의 리듬이 외부의 리듬과 만나서 공명을 일으키면, 신기가 활성화되어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신바람은 자연과의 조화, 즉 내 몸 속의 리듬(주파수)이 자연의 리듬과 공명이 되어 나타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신바람의 4가지 성격

 

이렇게 발휘된 신바람은 어떤 성격을 가질까요? 먼저 신바람은 자연성을 가집니다. 앞에서 신바람이 자연과 조화 속에서 잘 발휘된다고 밝혔듯이, 도덕이나 규범 같은 틀에서 벗어난 자연상태로 돌아갈 때 우리의 생명본성은 해방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신바람은 활성화됩니다.

 

탈춤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흥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왜 흥이 나고 신바람이 날까요? 그 매개체는 '탈'입니다. 서구의 가면무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작이니 백작 같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사회적 위신이나 체통 때문에 그리고 도덕적 규범 때문에 점잖을 빼다가도 가면을 씌워 놓으면 신나게 노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사회적 도덕의 가면으로 분장하고 군자연(君子然)하고 있을 때는 신바람나게 놀지 못하지만, 그 위에 다시 또다른 가면을 썼을 때는 굳이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의 의미가 된다'는 논리를 빌지 않더라도, 자기의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신명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탈춤도 사회적으로 주어진 도덕적 탈 위에 다시 말뚝이탈이나 초랭이탈 등을 씀으로써, 사회적 제약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자기의 본래 얼굴로는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리낌없이 하게 되고, 신명나게 춤을 출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되찾는 순간 곧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것이든 자연상태로 되돌아가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신바람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연성은 신바람의 한 특성이 됩니다. 신바람의 또다른 성격으로는 자연성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자발성을 들 수 있습니다. 자발성이 의미하는 것은 타인의 강요에 의해서는 신바람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신바람이 나지 않다가도 계속하다 보면 간혹 신바람이 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기본성이 자극되어 나타나는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춤을 추어서 먹고 사는 무희들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예사 사람들이 자기욕구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추는 춤은 신명의 춤이지만, 무희들에게 있어서 춤은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한 생활 방편 곧 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춤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생동감이 없어 보이고 신명도 느낄 수 없습니다. 마지못해서 추는 춤, 일로서 추는 춤에서는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발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발성은 다른 말로는 주체성과 민주성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통제가 없어야 하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요소에는 최소한의 자기 만족감, 다시말해서 자기 해방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세상의 모든 고민과 책임, 의무 같은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나타나는 것이 신바람이고 신명입니다. 축제를 한다든가 굿을 한다든가 할 때 신명이나 신바람이 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신바람의 또다른 성격으로는 변혁성이 있습니다. 사회의 굴레나 모순에서 벗어나는 피동적인 자발성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능동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신바람 속에는 들어있습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 신바람이 나게 되고, 또한 신바람이 나서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로는 3.1운동이나 프랑스혁명을 들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의적으로 일어나서 그것이 변혁에 대한 기대로 신바람을 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고, 그로 인해 민족의 독립이라는 신바람나는 일을 해낸 것이라면,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기치아래 집단적으로 일어나서 신바람나는 민주사회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혁의 신바람은 사회적 모순을 불치의 병처럼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 할 때 발생됩니다. 앞에서 무병을 앓아야 신내림의 무당이 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신이 지핀 무당이 초능력을 발휘하고 자기의 질병을 고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질병도 굿의 신명을 통해 치유하듯이, 사회적 질병을 뼈져리게 겪은 민중이야말로 이를 극복하려는 변혁운동에 신명을 바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신바람의 중요한 성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바람이 개인적인 것일 때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지만, 3 1운동이나 프랑스혁명 때처럼 신바람이 집단화될 때는 그것이 지속되어 역동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신바람이 다른 사람을 자극하고, 그것이 또 다른 사람을 자극하여 신바람이 나게 하고, 그것이 반복적으로 계속될 때 그 힘이 무한대로 커지게 되어 혁명까지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해소 차원의 신명풀이도 있겠지만, 그것이 집단화되어 독립이나 민주화운동 같은 변혁운동으로 전개될 때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변혁운동이 자연과 더불어 신바람을 공유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민중이 해방되고 민족이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지구가 망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억압받던 민중이 봉기하고 식민지배에 약소민족이 저항하듯이, 사람들의 일방적인 자연정복에 대해 마치 자연이 총공세를 펴며 반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환경위기입니다. 사람이 저만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개발과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된 산업사회의 역기능으로 빚어진 환경의 오염이 계속된다면, 인류가 망해버리고 더불어 지구까지 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자연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신기의 상당부분은 자연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과 사람도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자연이 오염되어 거기서 나오는 신기가 줄어들면, 그만큼 우리 인간의 삶은 신바람을 잃어가게 되고 생기마저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과 자연이 모두 망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즈음 환경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맺힌 것을 풀어주고, 神과 自然과 人間의 共生을 담보하는 굿

 

지금까지 우리는 신바람에 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오늘의 강의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과연 우리의 민속문화 속에서는 신바람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가를 굿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에서는 신바람을 살펴보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래나 춤에 대해 간단히 얘기했었는데, 역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굿이 아닐까 합니다. '굿'은 가장 외재적인 신기와 가장 내재적인 신기가 만나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초능력과 신통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해주고 가족들의 문제도 해결하며, 또 마을과 나라의 여러가지 재앙도 막아줍니다. 물론 무당이 하는 굿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당굿도 있고, 풍물굿도 있으며 문제의식과 대상에 따라 집안굿도 있고, 마을굿도 있고, 나라굿도 있습니다. 또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아주 우스운 모습이나 꼴불견의 모습을 보았을 때 얘기하는 '굿 보이네!' 또는 '굿하고 있네!'라는 것도 있습니다.

 

굿의 의미는 이처럼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능은 다름이 아니라 '맺힌 것을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즉 신명풀이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회과학적 용어로 바꾸어 보면, 굿에서 '맺힌 것'은 구조적 모순이며, '푸는 것'은 해결입니다. 굿을 하여 맺힌 것을 푼다는 것은 곧 '모순을 해결한다'라고 사회과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 작게는 내 몸 속의 병을 치료하는 것까지도 모두 굿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굿이나 마을굿 그리고 통일굿 등은 사회적인 모순을 해결하려는 굿입니다. 

 

요즘에는 공해굿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굿의 기능은 신바람의 성격에서도 나타나듯이 변혁성입니다. 그것이 일련의 사회운동과 다른 점은 주술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하는 바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변혁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일련의 사회운동과 굿은 같은 것입니다. 또한 변혁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법적 사회적 제재를 받듯이, 주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도 미신이라고 조선조나 일제 때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유사합니다.

 

어쨌든 굿은 변혁적이며, 그 속에 있는 춤과 노래는 예술성이 강합니다. 탈춤이란 것도 굿의 예술성이 확대된 것입니다. 굿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방법적인 면에서는 주술성을 갖고, 현상적인 면에서는 예술성을 가지며, 목적의 측면에서 보면 변혁성을 가집니다. 하회별신굿 속에서도 여러가지 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려는 변혁성이 두루 갈무리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굿의 변혁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변혁성은 민중적 신명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굿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공생성(共生性)입니다. 그것은 굿에서 섬기는 대상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산을 섬기고, 바위를 섬기고, 나무를 섬기고, 바람과 바다와 땅과 물을 섬깁니다. 모든 자연현상을 다 섬깁니다. 그것은 말을 바꾸면 모든 자연현상을 '위하는 것'이고,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자연보호입니다. 이처럼 굿에는 공생적인 세계관이 갈무리져 있습니다. 굿이 가지는 이러한 성격, 즉 변혁성이나 예술성, 공생성 같은 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환경의 오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환경문제는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공생적인 세계관을 이루어가는데 참으로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UN에서 토착종족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들이 어떻게 자연과 더불어 공생해왔고, 그들로부터 산업사회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가장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가장 현대적인 삶의 대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맺으며

 

오늘 '민속문화 속의 신바람'이라는 주제의 강의는 이론적으로 그 모습을 새롭게 밝혀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난 모습을 대략적으로 살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 속에 진보적으로 잘 적용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많이 얘기했듯이 이제는 정말로 환경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때입니다. 저는 민속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연구방법의 하나로 민속문화 속에 나타난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세계관을 규명하여 체계적으로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제가 해 온 민속연구는 주로 민중문제와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제부터 이런 문제들을 껴안고서 환경문제와 생명문제를 해결하는데 다소나마 힘을 보탤 수 있는 연구활동으로 나아갈 계획으로 새로운 연구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환경오염 문제가 해결되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의 신기가 교감하고 그것이 폭발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킬 때, 비로서 환경문제를 비롯한 인류사회의 제반 문제가 잘 풀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공생하는 가운데 신바람나게 살아갈 수 있는 공생적인 사회의 도래를 기원하며 오늘의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 

약력: 영남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문학박사(민속학) 현 안동대 교수(민속학) 현 정신문화연구원 구비문학 조사위원

저서: 꼭두각시 놀음의 이해, 민속문화론, 전통상례,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 한국민속과 전통의 세계, 한국구비문학세계(7-9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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