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세계무신론에 관한 글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18 23:56:33    조회: 3,102회    댓글: 0

이글은 현대인들에게 깊이 뿌리 밖혀있는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비판에 대하여 기독교의 일원론적 패러다임안에서 서술한 글입니다. 현대 사회와 근대과학은 신도 세계와 무관한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과학이 지구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원을 고갈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피폐하게 하여 밝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보는 무신론의 뿌리는 어디일 것 같습니까.  

 

*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하늘의 모든 신성과 부처와 보살이 하소연하므로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증산도 도전 2:30:7~10) 


무신론에 관한 글


https://www.youtube.com/watch?v=XKbXZoRuEPo  

 

 

 

이젠 살아남는게 목적인 세대는 갔다.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인 시대가 왔다.
좌익, 우익, 중도...이데올로기는 쓰레기통에 갔다.
불안한 사람들은 새로운 적을 찾아헤맨다.

어디로 가는가, 얼만큼 왔는가,혹은 제자리인가.
거꾸로 가는가, 알기는 아는가, 이게 뭔 소린가.

Virtual Reality. Cyver OOO... (Dreams Come True!) 
한편엔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The World Of Confusion, The Age Of No Gad!
이제는 무엇에 기대에 살텐가.

어디로 가는가, 얼만큼 왔는가,혹은 제자리인가.
거꾸로 가는가, 알기는 아는가, 이게 뭔 소린가.

번쩍거리는 OO에는 OO행 엘리베이터가 있다.
들어가고 싶은가? 입장료는 선불이다.
TV Is My King, Money Is My God.
이제는 무엇에 기대어 살텐가.

어디로 가는가, 얼만큼 왔는가,혹은 제자리인가.
거꾸로 가는가, 알기는 아는가, 이게 뭔 소린가.

        신해철, The Age Of No God 中

 

   

 

1. 무신론의 뿌리를 밝힘.


무신론의 뿌리.  

 

우리는 위기에 휩싸인 지구에 살고 있다. 신문의 표제만 잠시 훑어보더라도 날마다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의 절망적인 상태 때문에 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다.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 한다. 당신도 그러한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느냐의 여부에 따라 우리의 미래관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이 없다면 인류의 생존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데, 인간의 파괴적인 잠재력을 감안할 때 그것은 암담한 생각이다. 만약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참으로 믿는다면, 이 지상에서의 삶에는 진정 목적-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전반에 걸쳐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이 때때로 있어 왔지만, 유독 최근 몇 세기 사이에 무신론이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뿌리를 식별함.  

 

높이 솟은 나무의 자태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잎과 가지와 줄기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무의 생명의 근원인 뿌리는 땅속 깊이 숨겨져 있다.  

 

무신론도 그와 흡사하다. 치솟은 나무처럼,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이 점점 성장하여 19세기 무렵에는 인상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생명과 우주가 초자연적인 제일 원인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러한 창조주를 숭배하는 일은 시간 낭비인가? 당시의 주도적인 철학자들의 대답은 강경하고도 명백하였다. "우리에게 도덕률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처럼, 종교 역시 필요 없다"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언하였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꿈"이라고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단언하였다. 그리고 후대에 상당 기간 큰 영향을 미칠 저술물들을 남긴 카를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확언하였다. "나는 종교의 사슬에서 벗어난 정신의 자유를 더욱 누리기 원한다."많은 사람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무신론의 잎과 가지와 줄기에 불과하였다. 19세기가 시작되기 오래 전에 무신론의 뿌리는 자리를 잡고 싹을 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리스도교 국의 종교들이 현대에 무신론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이러한 종교 단체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상당한 환멸과 항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씨가 뿌려지다.  

 

중세에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아메리카나 백과사전]은 이렇게 기술한다. "가톨릭 교단은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돌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고위 교직자, 특히 주교들은 귀족 출신으로 보충하였고, 이들은 자기들의 직분을 주로 명성과 권력을 얻는 수단으로간주하였다."  

장 칼뱅이나 마르틴 루터와 같은 일부 사람은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방법이 언제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은 아니었다. 편협과 유혈이 종교 개혁의 특징을 이루었다. (비교 마태 26:52) 일부 대항 방식이 너무 사악하였기때문에, 삼 세기 후에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칼뱅이 나타낸 극악한 태도로 신을 모독하기보다는, 아예 신을 믿지 않는 편이 용서받기가 더 쉬울 것이다."

 

종교 개혁이 정결한 숭배를 회복하지 못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악화시켰다. 더 이상 교황청은 신앙에 대한 전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새로 생긴 프로테스탄트 분파들에 가담하였다. 종교에 환멸을 느낀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자유주의적 태도가 잇따르면서 하느님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용인되었다.  

 

 

회의주의가 싹 트다.  

 

18세기 무렵, 합리주의적 사고가 세계 문제에 대한 만병 통치약으로서 일반적으로 격찬을 받았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지도를 구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간의 진보가 방해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담하게 알려고 하시오!", "용기를 내어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시오!"하고 그는 강력히 권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계몽 운동의 특징이었으며, 이 시기는 이성의 시대로도 알려졌다. 18세기 내내 지속된 이 시기는 지식 탐구에 몰입하는 일로 특징을 이루었다.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Milestones of History)이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회의론이 맹신을 대치하였다. 모든 전통적인 신념과 관습이의문시되었다."  

 

면밀히 검토된 "전통적인 신념과 관습" 중 하나는 종교였다. [일반 세계사](The Universal History of the World)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관을 바꾸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늘에서 받을 상에 대한 약속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지상에서의 더 나은 생활을 요구하고있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존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계몽주의 철학자들 대부분이 종교를 경멸하였다. 특히 그들은 사람들을 무지 속에 가둔 책임을 권력에 굶주린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 탓으로 돌렸다.  

 

이러한 철학자들 중 다수가 종교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이신론자(理神論者)가 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는 하였지만, 그분이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신론자들은, 하느님께서 시계 제작자와 흡사 하게 창조물을 활동하게 한 다음 완전히 등을 돌리고는 전혀 무관심한 채로 계시다고 주장하였다. [현대의 유산]책에 따르면, 이신론자들은 무신론이 절망에서 생긴 오류이기는 하나,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적 체계와 그 교리의 완고함과 편협함이 훨씬 더 통탄스럽다고 생각하였다.●) 노골적인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소수 있었는데, 폴 앙리 티리 올바크와 같은 철학자는 종교가 "분열과 광기와 범죄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국에 대해 진력이 났고 올바크의 심정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국이 무신론의 성장을 촉진시켰단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신학 교수인 마이클 J. 버클리는 이렇게 기술한다. "교회가 무신론의 온상이었다. 제도화된 종교들이 서구 사람들의 도덕적 감각을 몹시 자극하고 혐오감을 일으켰다. 교회와 분파들이 유럽을 유린하였고, 대량 학살을획책하였으며, 종교적인 저항이나 혁명을 강요하였고, 군주들을 파문하거나폐위하려고 시도하였다."  

 

 

무신론이 극에 달하다.  

 

19세기에는 하느님을 부인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있었으며, 널리 펴져 나갔다.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거리낌없이 대담하게 자기들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한 무신론자는 기탄 없이 이렇게 선언하였다. "하느님은 우리의 적이다.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인류가 참으로 진보하려면 무신론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20세기 중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느님을 부인하는 일은 다소수그러졌으나, 다른 종류의 무신론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공언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 참조 -  

 

무신론의 뿌리를 보강함.  

 

18세기 중엽,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한 권으로 된 백과 사전을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달성한 일은 고용주의 기대를훨씬 넘었다. 디드로는 그 시대의 정신을 보존하는 28권으로 된 [백과 전서]를 편찬하는 데 약 30년을 보냈다.  

 

[백과 전서]에는 실용적인 지식이 많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주로 인간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었다. [위대한 인간 시대](Great Ages og Men)라는 전집에 따르면, 그 백과 사전은 "인간이 신앙 대신 이성을 지도 원칙으로 삼는다면 자기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다는 철학자들의 혁신적인 신조를 대담하게 전파하였다."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은 점이 두드러졌다.  

 

[현재의 유산]에 따르면, "그 사전의 편찬자들은 주제 선정을 통해, 종교가사람이 꼭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교회가 [백과 전서]의 발행을 금지하려고 시도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법무 장관은 그 사전은 정치, 도덕 및 종교에 대한 파괴 요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비난하였다.  

 

반대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4000명-그 백과 사전의 엄청난 가격을감안하면 놀라운 수-이 디드로의 [백과 전서]를 주문하였다. 무신론적인 저류(底流)가 하느님을 부인하는 당당한 기세로 진전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2. 20세기에 하느님을 부인함

 

"사람들은 하느님이 없다는 사상을 따르며, 이롭든 해롭든 독립적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생활을 꾸려 나간다." [백년간에 걸친 하느님에 대한 논쟁-현대 무신론의 근원](One Hundred Years of Debate Over God-The Sources of Modern Atheism) 중에서... 

 

높이 솟은 나무가 처음에는 인상적이지만 결국 평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웅장한 자태에 익숙해지면, 그 키도 더 이상 외경감을 자아내지 못한다.

 

무신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세기에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이 충격을 주지 않고 혼란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관용의 시대는 무신론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하느님을 공공연하게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도처에 있는 11개 나라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평균 2퍼센트 남짓한 사람들만이 무신론자로 자처한다는것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무신적인 영이 만연하며, 심지어 하느님의 존재를믿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느님의 권위를 부인함.  

 

"때때로 무신론은 단순히 행동으로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아메리카나 백과 사전]은 기술한다. 이러한 이유로 [옥스퍼드 신 영어 소사전]의 "무신론자" 표제어 아래 나오는 두 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도덕적으로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 불경한 사람."

 

그렇다. 무신론은 하느님의 존재나 권위를 부인하거나 혹은 둘 다 부인하는뜻을 내포할 수 있다. 성서는 디도 1:16에서 이러한 무신적인 영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인정한다고 공언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분을 부인합니다." -[신 영어 성서]  

 

그처럼 하느님의 권위를 거부하는 일은 첫 인간 부부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하와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였으나, "하느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 원하였다. 이 말에는 하와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신을 위한 도덕률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뒤이어 아담은 하느님의 권위를 부인하는 이 일에 하와와 함게 하였다.-창세 3:5,6.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에고 만연해 있는가? 그렇다. 교묘한 형태의 무신론이독립을 추구하려는 데서 드러난다. [백년 간에 걸친 하느님에 대한 논쟁-현대 무신론의 근원]이라는 책은 이렇게 기술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의 감시 아래 사는 데 지쳐 버렸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기를 더 좋아한다."

 

성서의 도덕률은 비실용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외면당한다. 많은 사람의생각은 다음과 같이 도던적으로 선언한 이집트의 파라오의 생각과 흡사하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노라."파라오는 여호와의 권위를 거부하였다.  

 

그리스도교국이 하느님을 거부함.  


하느님의 귄위를 부인한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경우인데, 그들은 정결한 성서 진리를 인간이 만든 전통으로 대치하였다. (비교 마태 15:9) 더욱이 그들은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끔찍한 유혈 전쟁을 지원하였고,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라는 성서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요한 13:35.  

 

또한 교직자들은 하느님의 도덕 표준에 등을 돌림으로 그분을 부인하였는데예를 들면 소아 성애 혐의로 사제들을 고발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난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한다. 그리스도교국의 상황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상황과 유사하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러한 말을 들었다. " 그 땅에 ○○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에스겔 9:9; 비교 이사야 29:15)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를 완전히 버린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그렇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버려야 하는가?  

 

 

무신론에 대한 타당한 근거?  

 

종교의 위선을 목격하였든지못하였든지 간에, 많은 무신론자들은 하느님의존재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있는 고통을 도저히 조화시키지 못한다. 시몬드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로서는 세상의 모든 모순을 짊어진 창조주보다는 창조주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가 더 쉽다."

 

위선적인 종교인들이 일으킨 일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불공정한 일들은 하느님이 없음을 증명하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칼이 무고한 사람을 협박하거나 해를 입히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이것은 그 칼의 설계자가 없음을 증명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악용되었음을 보여 주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겪는 많은 슬픔은 인간이 이 지구 자체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을 오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일부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존재를 믿는 것은 논리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기나 음파나 냄새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 어느 것도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폐와 귀와 코를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증거만 있다면, 볼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것의 존재를 믿는다.  

 

자연 과학자인 어빙 윌리엄 크노블록은 전자, 양자, 원자, 아미노산 Æ씜 복잡한 두뇌를 포함하여 물리학적인 증거를 숙고한 후에 이렇게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에게는 신성(神性)의 존재가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유일한 논리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 (비교 시편 104:24) 이와 비슷하게 생화학자 마린 북스 크라이더도 이렇게 말하였다. "보통 사람으로서 그리고 과학 연구와 조사에 생애를 바친 사람으로서,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만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다. 물리풔 교수인 헨리 마거노에 따르면, "일류 과학자들을 살펴보면 그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과학의 진보도 종교의 실패도 창조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버러야 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첨언: ​

이 글은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서 쓰여진 글입니다. 증산도는 창조 사상이 아니고 개벽사상입니다. 개벽과 창조는 엄연히 다릅니다. 개벽이란 무엇일까요.

개벽은 우주가 그 변화의 흐름을 타고 129,600년마다 2번씩 있습니다. 우주에 생명체를 싹트는 봄철 개벽을 선천개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봄과 여름의 뜨뜻한 생장기운을 받고 분열 성장한 생명을 다시 통일시키고 수렴하는 가을철개벽을 후천개벽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후천개벽이 일어나려고 하는 때입니다. 이제야 느즈막하게 과학계에서는 밝혀가고 있습니다. 뭇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종말사상의 해답은 후천개벽입니다. 

윗글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 관심을 두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말의 참 뜻은, 지금이 우주가 성숙을 위해 성장하는 우주의 봄과 여름의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제님은 우주의 주재자로서 생명을 키우고 추수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상제님은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해와 달이 나의 명(命)을 받들어 운행하나니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느니라."(증산도 도전 2:20)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우주의 여름, 즉 성장의 시대로 상극(相克)의 기운이 우주를 지배하는 이치입니다. 이것은 후천가을세계에 쓸 인간열매를 얻기위한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이는 오직 증산도에서 처음 밝히는 사실입니다. 머지않아 진짜 추수의 시기가 옵니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천지의 대세를 살펴 살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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