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3) 신시본기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07 14:39:03    조회: 522회    댓글: 0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3) 신시본기

고시씨가 불을 신지씨가 글자를 발명하였다


환국시대와 신시시대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첫째 환국시대는 유목시대였지만 신시시대는 농경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래서 고시씨가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고시씨는 농경을 전담하는 장관이었다. 유목시대에는 농경을 맡는 장관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이제 농경을 주업으로 하게 되었으니 환웅이 농경을 맡을 장관을 임명하였는데 그를 고시례라 하였다. 즉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記)에 의하면, 

환웅천황께서는 고시례高矢禮를 시켜서 백성을 먹여 살리는 사무를 맡게 하였는데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였다. 고시례는 불을 만드는 기술을 발명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진역유기』는 고려시대의 사서로서 조선후기의 역사가 북애北崖가 『규원사화』를 쓰면서 참고하였다는 책이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 보면 고수례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을 사람들이 "굿을 할 때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고수례!' '고수례!' 라고 하는데 그 소리"를 고수례라 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 고수례가 바로 고시례이다. 

우리 국어사전은 고수례의 역사적 유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모르기 때문이다. 고수례는 신시시대의 농경 담당 장관이었던 고시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풍습으로 남아 내려 온 우리 고유의 민속인 것이다. 이렇게 귀한 풍습이 어디 있는가. 김교헌의 『신단실기』(神檀實記)에는 고시례의 역사적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농가의 농사꾼이 들에서 밭을 갈다가 점심을 먹을 때면 반드시 먼저 한 숟갈을 떠내고 빌기를 "고시례" 라고 한다. 이것은 단군 때 고시라는 사람이 밭과 땅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밥 먹기 전에 먼저 제사지내는 것이다. 

김교헌은 고시씨를 단군시대의 인물이라 하였으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그 보다 앞의 신시시대의 인물로 보고 있다. 단군시대냐 신시시대냐 하는 점에 관한 견해 차이는 대종교大倧敎와 단단학회檀檀學會의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종교는 단군시대를 단단학회는 환웅의 신시시대를 각각 역사의 상한선으로 잡기 때문에 생긴 의견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차이로 인해서 두 단체가 갈라서게 되었다. 물론 또 다른 견해 차이도 있지만. 

『신시본기』에는 고시씨가 또 불을 발명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불에 관한 신화는 민족에 따라 다르다. 불의 신을 화신이라 하며 화신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을 켰다. 우리 나라에도 화신이 있어 오랫동안 부엌 신인 조왕신을 모셔왔다. 불의 사용은 이미 40만년 전부터였다고 하는데 불의 신을 믿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이후였다. 그것은 불의 발명으로 사람이 생식에서 화식火食을 하게 되고 도자기를 굽는 기술 그리고 쇠를 녹이는 기술(鑄冶之術)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의 발명을 인류 역사상 '제1의 산업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고시씨는 어떻게 불을 지피는 방법을 알아냈을까. 고시씨는 산에서 우연히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가지가 강풍에 부디 쳐서 불이 나는 것을 보고 사람도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신화가 아니다. 다른 나라의 화신火神이야기는 불을 신으로부터 훔쳤다느니 여성의 음부에서 불을 꺼냈다느니 하는 완전한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시씨 이야기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신지씨가 글을 발명하였다


『신시본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신시시대부터 옛 글이 있었는데 신지씨가 이 글자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우리 문자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환웅천황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짓게 하였다. 신지씨가 어느날 사냥에 나갔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글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태고문자太古文字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대에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증거는 무엇인가. 경상남도 남해와 저 백두산 북쪽의 경박호와 선춘령의 바위에 이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신지씨가 발명한 글자라는 것이다. 

일찌기 듣기로는 "남해도南海道의 낭하리郎河里 계곡 그리고 경박호鏡珀湖와 선춘령先春嶺의 저 오소리烏蘇里 암석에 언젠지 모르지만 조각한 글씨가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혹시 신지씨가 만들었다는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남해도 낭하리란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의 이동면을 말하는 것이며 여러 개의 바위에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남해각서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그것이 진시황을 위해 불로초를 찾아다닌 서씨徐氏의 글이라 전해 왔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는 남해각서를 단군 때부터 내려오는 옛 글씨로서 그 내용을 "어떤 제왕이 수레의 뒤에 사냥개를 달고 짐승과 새를 쏘면서 가는 형상인데 앞에 물이 있고 그 물 건너에 다 깃대를 꽂았으니 이것은 제왕이 사냥에 나서면서 물을 건너 깃발을 세워 국경을 긋는 공덕비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가 있는데 그와 같은 순수비라는 것이었다. 

이 글을 남긴 사람은 누구였을까. 정인보 선생은 고조선인이 상용하던 글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글자 모양이 새 발자국처럼 생겼는데 이것은 고려 성종의 조칙 가운데 나오는 '조적현문鳥跡玄文'이란 글이다. 조적현문이란 중국의 성어成語를 따서 표현한 것으로 보기 쉬우나 우리 나라 고대 문자가 실제로 새 발자국과 같았다고 한다. 정인보는 『신시본기』를 보지 못하고 우리의 옛 글이 새 발자국 같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춘령은 지금의 연변조선자치구 안에 위치하고 경박호는 그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실제로 찾아가 보기 어렵다. 그 곳 모두가 발해 땅이었고 고려 때 윤관이 선춘령까지 쳐들어가서 우리 영토로 만들려고 한 일이 있다. 그러나 허약한 고려왕조가 여진의 요구에 못 견디어 내어주고 말았다. 국력이 약하면 영토뿐만 아니라 문자와 신앙까지도 모두 버리고 남의 나라 글자(한자)와 종교(불교)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한 때 대학 입시에 국, 영, 수가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요즘에는 영, 수, 국으로 역전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신시본기』는 이렇게 개탄한다. 

이에 우리 나라가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하여 옛 문자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새삼 한탄하지 않을 수 없도다. 

그밖에도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 그리고 치우 등을 시켜서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환웅천황은 풍백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환웅천황은 또한 우사 왕금王錦을 시켜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목축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운사 육악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로 하여금 병마도적兵馬盜賊을 관장케 하였다. 

 

환웅의 신시는 선진국이었다


위의 신시역대표에서 보았듯이 치우는 14세 자오지 환웅이었다. 치우에 관해서는 중국의 사마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은 공자의 『춘추』를 비롯한 여러 중국 문헌과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구전)을 듣고 치우(동이족의 시조)와 헌원(한족의 시조)의 싸움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치우환웅이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이어서 자기네 조상으로 추정되는 황제를 치켜올리고 치우천왕을 역사의 악역惡役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측 기록인 『신시본기』에는 헌원을 악역으로 몰고 있다. 서로 보는 입장이 다르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시본기』에서는 『삼한비기』(三韓秘記)를 인용하면서, 먼저 치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번개와 비를 내리게 하여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라 한다. 치우는 마치 수퍼맨과 같은 초인이었다고 한다. 

또 몇 대 지나 자오지慈烏支 환웅시대가 되었다. 자오지(치우) 환웅은 그 용맹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飛石迫擊之機)를 만들었다. 천하가 모두 이를 두려워하여 함께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 치우라 하였다.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당시 동방의 신시는 쇠를 달구어 농기구를 만들고 창 칼, 그리고 갑옷을 만들 수 있는 선진국이었다. 서방의 한족漢族보다 훨씬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발전에 기여한 세력은 치우씨와 고시씨와 신지씨 그리고 풍백 운사 우사였다. 그 때문에 이들 성씨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치우가 등장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들이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이 등극함에 이르러 구리와 쇠를 캐서 쇠를 달구어 칼과 창 그리고 대노大弩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사냥하고 정벌함으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족外族들이 치우를 신으로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치우가 만든 대궁大弓의 위력을 풍문에 듣고 간담이 서늘한 자가 많았다. 

이처럼 치우의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지자 한족漢族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부르기 시작했다. 동이란 말은 본시 저들이 우리를 매우 두려워하고 부러워하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공자孔子(전 552∼전479) 이후로는 동이가 오랑캐란 멸칭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이夷란 글자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로부터 나온 글로 동쪽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ㅆ大ㅆ弓爲東方人者)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춘추』春秋에 이르러서는 이夷 자를 가리켜 마침내 융적戎狄과 같은 뜻인 오랑캐의 호칭이 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선진국이었다가 뒤에 차츰 국력이 약화되어 후진국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신시와 단군조선시대 까지는 결코 후진국이 아니었는데 그 뒤 한족의 나라가 앞서나가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중국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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