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4) 신시본기 (2)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09 13:47:08    조회: 448회    댓글: 0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4) 신시본기 (2)

박성수 /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원장


 

태백산은 본시 백두산이었다

신시의 중심은 태백산이었다. 본래의 태백산은 백두산이지 묘향산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웅이 삼천 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왔다"고 하면서 괄호하고 '태백산은 오늘의 묘향산太伯山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 주석 때문에 태백산의 백자는 흰 백자가 아니라 맏 백자요 태백산의 위치는 묘향산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저자는 고려시대의 불교신자였으므로 제대로 역사를 전했다고 볼 수 없다. 


『태백일사』는 『삼한비기』를 인용하면서 백두산이야말로 배달국의 진산鎭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저 백두거악白頭巨嶽은 대황大荒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니 가로는 1,000리요 높이는 200리가 넘는다. 웅장하고 험준하고 울퉁불퉁 거창하니 배달천국의 진산이다. 지금 백두산 정상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가 모두 여기서 시작된다. 가로대 천지라 하는데 환웅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리신 곳이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린 것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어찌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 하는가. 묘향산에는 한웅큼의 물구덩이도 없으니 환웅천황이 내려온 곳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시본기」)

 

만일 묘향산을 태백산이라 하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땅을 압록강 이남으로 국한하는 꼴이 된다. 태백산을 묘향산이라 주장하는 자들은 그 눈구멍이 콩알만해서 대륙의 강토가 보이지 않고 한반도만 보였던 것이다. 묘향산의 위치를 보라. 만일 거기가 태백산이라면 그 결과 우리 역사의 절반이 잘리고 없어진다. 
 

세상의 속담에는 평안도 영변에 있는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 한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설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것은 저들의 눈구멍이 콩알만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실을 인정할 경우 우리 나라 강역은 압록강 이남의 땅으로 좁혀지고 마는 것이다. (「신시본기」)

 

태백산을 묘향산이라 보게 되면 우리 스스로가 반도사관에 빠지고 만다. 압록강 이남의 땅만 우리 땅이 되고 광활한 대륙의 땅은 몽땅 남에게 넘겨주고 마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반도사관은 일제침략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는데 놀랍게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물론 일연의 『삼국유사』가 모두 그런 것들이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대주의가 마치 국시國是처럼 되어버려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중국의 곤륜산을 우리 민족의 태백산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소중화小中華를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공朝貢을 바치느라 중국을 들락날락한 역사가 이미 백년이나 되었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니 정말로 붓을 던져 장탄식할 일이 아닌가. (「신시본기」)

 
사대주의가 극에 달한 조선시대를 비방할 자격이 현대인에게는 없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 사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옛날 사람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이다. 

 

태백산은 신성한 산이요 불로초가 나는 산이었다

태백산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 신비스런 산이라 소개되고 있다.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에 보면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고 하였다. 위 나라에서는 이를 태황太皇이라 하였다. 범, 표범, 곰, 이리가 살고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환웅이 이 산에 내려 오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을 신주흥왕神州興王의 영지靈地라 하니 소도제천蘇塗祭天의 옛 습속이 이 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두산에는 산삼이라는 불로초가 있고 불로초를 먹고 장수하는 선인이 살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비의 산이어서 진시황이 서복이라는 사람을 시켜 산삼을 캐게 하였다는 산이 바로 백두산이었다. 서복은 결국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어디론가로 도망치고 말았다.
 

『사기』(史記) 봉선서에 보면 "이 산은 발해의 한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찍이 그 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仙人과 죽지 않는 약이 그 산에 있다 하며 그 산의 사물들과 짐승들까지도 빠짐없이 흰 색이요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하였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가로대 "삼신산에는 사람의 혼을 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 한다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예부터 흰 사슴, 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 『괄지지』(括地志)가 말하는바 "새 짐승 풀 나무가 모두 희다"고 하였다. 또 백두산 일대에서는 많은 산삼이 나오는데 세상 사람들은 산삼을 불로초라 하였다 한다. 산사람들이 산삼을 캐러 갈 때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산신께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입산하였다. 『단군세기』에 가로대 "단군 오사구烏斯丘 원년에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었다" 하였다. 아마도 산삼을 말하는 것 같다. (「신시본기」)

 

어찌 되었건 민족의 성산 태백산은 환웅이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오신 산으로서 그 후예가 우리들인 것이다. 백두산이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저 우리 환족桓族은 모두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에서 나왔다. 후세에 여러 성씨의 구별이 생겼다고 하나 실은 환단 한 줄기의 후예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환웅이 신시에 내려오신 공덕은 당연히 전송傳誦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왕先王과 선민先民들이 삼신고제三神古祭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三神山이라 함도 역시 이를 후손들에게 전송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시본기」)

 

그런데 한가지 덧부쳐 이야기 할 것은 태백산이 백두산에서 묘향산 그리고 태백산 지리산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 태백산은 처음 배달국(신시)의 영산이었으니 당연히 그때는 백두산이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광활한 대륙을 상실하게 되자, 후대의 후손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나라들은 각기 따로 태백산을 두게 되었다. 산은 옮길 수 없으나 산 이름은 옮길 수 있으니 일정한 산을 태백산이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신라는 그 강역이 경상도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경상도 봉화군의 한 산을 태백산으로 이름 붙여 숭앙하게 되었다. 태백산은 현재 강원도 태백시에 있으나 옛날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경상도 봉화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이 신라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지리산을 태백산으로 삼은 것 같고 고구려는 어떤가 하면 수도를 압록강 건너 집안集安에서 평양으로 옮긴 뒤 영변의 묘향산을 태백산으로 삼았다. 일본으로 건너 간 우리 조상들은 그들대로 일본 땅에 태백산을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곳곳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태백산 옆에 보면 반드시 소백산이 있어 태백산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 드리는 천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태백산에서 대제大祭를 지내고 소백산에서는 소제小祭를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고을마다 백산이 있었고 마을마다 신목神木이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백산을 이름하여 진산鎭山이라 했고 신목을 당목堂木이라 했다. 비록 이름은 바뀌었으나 그 실체는 같은 것이다. 

 

태백산에서 삼신에게 천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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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태백산 이외에도 소백산이 있고 또 백산이 있는데 태백산에서는 나라님이 하늘에 큰제사를 지내고 소백산에서는 작은 제사를 지냈는데 백산에서는 고을 원님들이 그 지역의 안녕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마을에서는 마을대로 신목에 제사를 지냈는데 모두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기도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특유의 풍습이었고 그 역사는 단군조선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환웅의 신시시대로 소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산이 있고 제천하는 풍습이 있다면 그곳에는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시기는 매년 10월 3일이었고 그 뜻은 우리가 하늘의 백성 즉 천민天民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10월 제천이라 하였다. 
 

10월 제천十月祭天은 마침내 천하 만세의 유습이 되었으니 이는 신의 나라 특유의 성전聖殿으로서 다른 나라에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의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 것이다. (「신시본기」)

 

그러면 하늘에 누가 계시는가. 삼신三神이 계시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삼신에게 기도 들였었는데 그 유습은 오늘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으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비록 건전하게 행해지고 있지 않았다고는 하나 근세에 이르도록 전해졌고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져서 거국 남녀가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이다. (「신시본기」)

 

그러면 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꼭 산 위에서 행하는가. 그것은 양은 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천天은 음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천에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높은 산기슭의 작은 산 위(高山之下小山之上)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것이 곧 태백산 기슭에서 천제를 지내게 된 유습이다. (「신시본기」)

 

천은 양이기 때문에 음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러기 때문에 강화도 참성단처럼 네모진 언덕에서 천제를 지내기도 한다. 
 

땅은 양을 귀하게 여김으로 땅에서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연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澤中方丘)에서 지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곧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지내는 연유이다. (「신시본기」)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은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굴다. 네모진 것은 땅이요 둥근 모양은 하늘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인가 의아하게 여길 것이지만 하늘이 땅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이다. 

강화도에 가면 전등사가 있는데 본시 그 이름이 삼랑성이었다. 단군의 아들 삼랑이 성을 쌓아 그곳에 천제단을 만들었다 하여 삼랑성이라 부른 것이다. 삼랑은 또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말한다고도 한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關雜記)에 말하기를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삼랑은 교화하고 복종하게 하는 것을 주관한다. 지금 혈구에 삼랑성이 있는데 성은 삼랑이 머물던 자리이다. '랑'은 곧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신시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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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삼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가. 삼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우리의 목숨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삼신은 곧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신이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10세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삼신에게 의탁한다. 저 삼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다. (「신시본기」)

 

한편 삼신은 천주로서 천지만물의 조상으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치우는 군신軍神으로서 천하 전쟁의 주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의 역대 장수들은 싸움에 임하여 반드시 먼저 치우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래야 승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兵主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武神으로서 용강의 조상이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 도술道術의 조종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을 부른다. 이로서 태시太始의 시대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天下戎事之主)가 되었다. (「신시본기」)

 

 

민속에 남은 삼신신앙은 모두 신시시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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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유교 등 외래종교가 들어와서 신시시대의 우리 고유문화가 잠적하여 민속문화로 살아남거나 불교나 유교문화의 일부가 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그 좋은 예가 지석묘라는 것이다. 일명 지석단이라고도 하는데 제석단帝釋壇이라고도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신시시대의 천제단이거나 신단들이었다. 불교가 들어와서 불교신자들이 이를 제석단이라 이름을 바꿨다. 
 

『밀기』(密記)에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기를 지석支石이라 하였다.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이를 지석단支石壇이라 하였다. 혹은 제석단이라고도 하였다. 산마루에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이를 천단天壇이라 하였다. 산골짜기에 나무를 심어 토단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 하였다. 지금 승도들이 이를 혼동하여 제석이라 말하고 있는데 실제 고사古事와 다르다. (「신시본기」)

 

우리 민족종교가 불교 속에 살아남은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이다. 대웅전이란 본시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만은 대웅전이라 한다. 
 

불상이 처음 들어 와서 절을 질 때 이를 대웅大雄이라 하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는 승가의 말이 아니었다. (「신시본기」)

 

대웅전에는 본래 삼신이 모셔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환웅이 제일이었다. 환인은 만물창조의 신 즉 조화造化의 신이요 환웅은 가르침의 신 즉 교화敎化의 신이요 환군 즉 단군은 다스림의 신 즉 치화治化의 신이었다. 종교란 교화다. 따라서 환웅의 이름을 빌어서 불상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하였던 것이다. 대大는 한 즉 크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 절에는 실제로 삼신을 모신 삼신각三神閣(산신각의 원명이 삼신각이다)이 있다. 한국의 사찰이라면 반드시 대웅전 옆에 삼신각을 지어 삼신을 모신다. 삼신각이 없는 절은 절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사찰에는 반드시 삼신각이 있다. 그러면 왜 절에 삼신각을 두고 삼신에게 제사를 들였을까. 여기에는 엄청난 종교전쟁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차돈이 신라에서 처형당한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차돈 이외에도 순교자가 많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사실은 기록에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은 종교 침략자 불승들은 수없이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박해 당했듯이 스님들도 단군 신도들에게 지독한 박해를 당했고 스님들이 애써 지은 사찰들이 화염에 싸여 불탔다. 그러니 절에 가는 것을 모두 꺼려했다. 그래서 절 안에 삼신각을 지어 신도를 유혹했고 불상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 즉 환웅전이라 했다. 그래야 방화사건도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도를 확보하고 나라의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삼신각을 산신각이라 이름을 바꿨다. 이제는 절에 방화하는 자도 없고 삼신각을 찾는 신도도 없어졌으니 이름을 삼신에서 산신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바꿔놓고 역사를 왜곡해도 삼신은 산신이 아니요 삼신인 것이다. 

 

신시의 삼신문화가 중국에까지 뻗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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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신앙은 비단 우리 민족만 믿었던 신앙이 아니라 이웃한 한족(중국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첫째 증거는 한무제가 삼신을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고구려를 여러 차례 침공했다가 패전한 중국의 제왕인데 그가 삼신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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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 나라의 왕 유철劉徹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겸양하시고 방탕치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입니다"라고 했으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三神上帝에 주를 달아 말하기를 "삼신의 설은 일찍이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신시본기」)

 

둘째로 제나라 풍속에 팔신제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우리 문화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 말하기를 "제齊 나라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다. 팔신이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기주 등 여덟 신을 말한다. (「신시본기」)

 

고려 때 묘청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역시 팔신제를 지냈고 또 고려의 팔관제가 유명하다. 

셋째로 중국의 명장들이 모두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에 승리하기를 바랐다. 한漢 나라 유방은 분명 동이족이 아닌데 그 마저 치우제를 지냈으니 기이한 일이다. 
 

유방劉邦이 동이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나 풍패豊沛에서 군사를 일으킨 인물이다. 풍패에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고 나라에서도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신시본기」)

 

더욱이 치우의 후예들이 아직 중국에 살고 있는데 여러 곳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치우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다가 치우기란 별 이름까지 있고 보니 치우가 중국에 끼친 영향이 심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誌)에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꼬부라져서 깃발과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셨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또 『통지』(通志) 「씨족약」(氏族略)에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蒼?은 고신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라고 했다.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英風偉烈함이 먼 나라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신시본기」)

 

그뿐만 아니라 치수법이 우리 신시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기자의 홍범 역시 신시의 것이었다. 
 

중국에 『오행치수의 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이라는 책이 있다. 사실 이것은 단군의 태자 부루夫婁가 우사고虞司空에게 전한 것으로 중국인의 책이 아니다. 뒤에 다시 기자箕子가 주왕紂王에게 홍범洪範을 전했다하는데 이 역시 태자 부루의 『오행치수설』과 『황제중경』인 것이다. 즉 이들 두 책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邱井과 균전均田의 법이 중국에 전해진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신시본기」) 


글쓴이 박성수 씨는 서울대 사대 역사학과를 거쳐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각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길렀으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을 역임한 후 한국정신문화원 편집부장으로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서 중국 속의 독립운동사적지 및 백두산, 발해사적지 등을 탐방하였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로서 정년 퇴임한 이후에도 왕성한 연구 및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월간개벽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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