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의 재인식 (3)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6-19 01:02:25    조회: 135회    댓글: 0

 

민족문화의 재인식 (3) 

 

 

세계보편문화의 한 일원으로서 민족문화의 개성

 

그동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교육에서는, 우리것은 무엇인가 후지고 잘못되고 시원찮다고 배워온 것 같습니다. 우리것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자랑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들을 지금 반추해보면,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것에 사랑과 애착을 가지고 조사를 해보니까, 우리것에 대한 공부를 새로이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것이 우수하다는 가장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해인사의 제일 뒤쪽에 경판각이 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보인 팔만대장경이 흙담과 나무창살로 되어있는 목조건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불이 나거나 도둑이 톱으로 베고 팔만대장경을 훔쳐가면 어쩌나 해서, 수십 억의 예산을 들여 그 오른쪽에 새로 부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한옥 모양의 콘크리트 건물을 훌륭한 설계가들의 설계로 지었습니다. 새로운 경판각을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험적으로 팔만대장경 중 몇장을 뽑아 새로 지은 경판각에 보관을 해 보았답니다. 새로 지은 경판각에는 여러가지 과학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지은 경판각에 보관을 했더니, 얼마 안있어 대장경판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합니다. 해인사 스님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보니까, 저는 석달인 줄 알았는데, 3일만에 대장경판에 곰팡이가 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 지은 경판각에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새 건물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했다가는 다 썩힐 판이었으니까요. 원래의 장소에서는 수백년을, 근 천년을 보관해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장경을 원래의 경판각에 두고, 수십억을 들여서 지은 집은 지금 승려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첨단기술로 설계하여 지은 집이 천년 전에 지은 집을 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 집의 비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창들은 네모반듯하게 기하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이쪽 창문열고 저쪽 창문열면 서류가 획 날릴 정도로 바람이 손살같이 통과해 버립니다. 그러나 경판각 창문을 보면, 아래위로 어긋지게 되어있거나 창문의 크기도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 들어온 바람은 곧장 반대편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또 경판을 꽂는 책장들이 바람의 방향과 거슬리게 가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판각으로 들어온 바람은 골고루 한바퀴 휘휘돌면서 경판 한장한장을 쓰다듬고 난 다음에, 반대쪽으로 나가게 되어있습니다. 또 경판각 바닥이 그냥 흙입니다. 흙에 소금과 숯을 일정한 비율로 같이 묻어서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수백년 전, 근 천년 전에 지은 건축물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온돌이야기도 했지만, 이러한 우리 전통문화의 이치를 오늘날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되살려야, 우리민족이 세계문화 속에서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만한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나름대로의 문화적 개성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값어치를 지닌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인간마다 개성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똑같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똑같은 형식의 로보트라고 생각해 보세요. 로봇 백대가 있다가 한대가 고장나거나 파괴되었다고 하면, 백대의 로봇이 구십아홉개로 줄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백명의 사람이 있다가 그 중 한명이 죽었다고 하면, 백명이 구십아홉명으로 줄었다는 산술적 개념으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그 한 인물이 어떠한 개성을 가지고 어떠한 문화를 창출할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에 '마지막 석기인(石器人) 이쉬족'이라는 프로가 텔레비젼에 드라마로 나오고 단행본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이쉬족의 한 사람을 그렇게 주목하는 이유는, 석기시대의 문화를 제대로 알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마지막 남아있는 그 사람 뿐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민족문화의 독자성과 개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어떤 나라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우리민족을 말살해도 세계사람들이 그 사실에 별로 저항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대만에 가면 고궁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고궁박물관은 현재 세계 5대 박물관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지 못하는 까닭 중의 중요한 하나는 고궁박물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국이 침공하기만 하면 고궁박물관을 터뜨려 버린다는 거예요. 실제 고궁박물관에는 폭파장치가 되어있다고 합니다. 장개석이 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까닭이 어디 있는가 하면, 본토에서 대만으로 철수할 때 세 가지의 철수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황금을 실어나르는 것, 군인을 실어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문화재를 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황금은 벌면 되죠. 돈은 다음에라도 벌면 됩니다. 군인은 이미 전쟁에 패했기 때문에 대만으로 실어가도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문화재는 지금 잃어버리면 영원히 잃어버린다고 판단하여 문화재를 싣고 왔습니다. 실제로 대만은 지금 세계에서 두번째로 외화보유액이 많은 부국입니다. 돈은 후에 얼마든지 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재들을 그 때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것을 영원히 확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화재는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이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존여비'관념' 이야기 : 여성 존중의 전통

 

우리가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중요시하는 것에는 아주 포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알게모르게 문화사대주의에 빠져있어서 민족주체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현재적이고 진보적이며 바람직한 것은 모두 서구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은 모두 서양에서 왔고 잘못된 것은 모두 우리것이라는 대표적인 보기가 사대주의와 남녀차별관념 같은 것입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이른바 남존여비사상이라고 우리가 배웠지요. 그것은 사상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무슨 사상입니까? 남존여비'편견'이라 하든지, 남존여비'관념'이라 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전통적으로 남존여비관념을 가지고 있고 서양사람들은 퍼스트레이디라 해서 여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서양문화가 들어옴에 따라 우리도 이제 어느 정도 남녀평등이 되었다'라고 이렇게 잘못 알고있는 이가 상당히 많습니다. 또 우리나라만 당시 대국이었던 중국을 섬기며 사대주의에 빠져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중세에는 어느 나라든지 사대(事大)를 했습니다. 또 중세에는 어느 나라든지 간에 남존여비관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세의 세계적인 질서였습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이 종주국이었던 것처럼, 저쪽 유럽지역에서는 로마 교황국이 종주국이었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로마교황을 중국의 천자처럼 받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지금 유럽에서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왕이 교황의 인준을 못받아서 교황청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밤세워 비는 굴욕적인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동지방에서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중국의 천자노릇을 했습니다. 중동의 각국들은 이집트 파라오에게 조공하며 이집트를 대국으로 사대했습니다. 

 

그런 세계적인 구도 속에서 우리만 사대적이고 남존여비관념을 가졌다는 엉뚱한 논리를 펴는데, 그 때는 그 때의 질서가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서양사람들보다 여자를 존중했습니다.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삼국시대 때의 처녀 총각들의 집합인 화랑이라는 집단이 있었지요. 그들은 산수좋고 경관좋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풍류를 즐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표가 누구였느냐, 원화였죠. 여자였습니다. 남녀 젊은이가 집단행동을 하는데, 그 집단행동의 대표가 여성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당시 남녀의 차별관념이 어떻게 존재했는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남자로 바뀌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처녀가 공동대표였었는데, 준정이 남모를 질투합니다. 그래서 자기집에 초대해 독한 술을 권했어요. 남모가 술 취하니까, 준정은 남모를 어깨에 걸쳐메고 형상강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이 사건이 터지면서, 여자들을 대표로 삼았더니 문제가 있구나 해서, 그 때부터 남자를 화랑의 대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 외에 여왕이 셋이 나온 것이나,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데도 남자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성도 왕족인가 아닌가를 함께 고려해서 성골 진골체계를 삼았다는 것, 또 불과 삼사백년 전인 17세기까지만 해도 남녀 균분상속(均分相續)이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아주 청렴하고 세계적인 학자인 퇴계 선생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상속한 기록을 보면, 자기 딸에게 논 몇마지기와 종 몇명, 집은 몇채 등을 준 기록이 보입니다. 요새 같으면 딸 시집가는데 땅 몇평과 아파트 두어채, 가정부 몇사람과 승용차에 기사를 끼어서 보내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있는 실상과 실제 자료와는 거리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용옥 교수의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예들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근본적으로 여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man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man이 아닙니다. woman은 여자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아담을 창조하고 에덴동산에 아담이 혼자 노는 걸 보니까 심심할 것 같아서 잠깐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만든 것이 이브라고 합니다. 즉 여자를 남자의 부속품처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의 성직자인 신부와 수녀의 차이는 굉장합니다. 남녀차별이 엄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 성직자에는 여자가 끼지 못합니다. 여자 목사는 아예 없습니다. 그래도 카톨릭이 좀 나은 편입니다. 서구사회의 전통적인 남녀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사람 인(人)이라 해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자를 나타낼 때는 특히 여인(女人)이라고 합니다. 또는 여성, 여자라고 나타냅니다. 그런데 남자는 남성 또는 남자라고 나타낼 수 있지만, 남인(男人)이라고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여자는 혼자 있어도 사람 곧 '여인'이 될 수 있지만, 남자는 혼자 있으면 결코 사람 곧 '남인'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홀애비 3년에 이가 서말이요, 과부 3년에 금이 서말'이라는 속담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남자는 혼자 있으면 사람 꼴이 이상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姓)이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맹세를 할 때 곧 잘 '성을 갈겠다'는 말을 하는데, 성은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몰라도 성은 묘지의 비문에 반드시 밝혀주었는데, '어디 이씨다, 어디 김씨다'는 말처럼 모두 성을 기준으로 표기했습니다. 박씨부인 또는 김씨부인이라 하거나 사임당 신씨라는 것처럼. '신숙주'라고는 말해도 사임당 신씨를 '신인선'이라고 사임당의 이름을 밝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이름보다 성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면 성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성(姓)이란 글자를 풀어보면, 여(女)자와 생(生)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생입니다. 성은 원시시대 때 모계사회에서 나왔는데, 성의 혈통은 어머니가 결정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 중세에 들어와 가부장적인 제도가 있어서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었는데, 미국이나 구라파 같은 경우를 보면 지금도 여자가 시집가게 되면 성을 갈아버립니다. 시집간 여자들은 자기 본래의 성을 잃어버립니다. 자기가 타고난 성,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재클린 부피에 여사가 케네디와 결혼해서 재클린 케네디가 되었죠. 케네디가 죽고 난 다음에 선박왕 오나시스와 결혼했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되었죠. 또 다시 오나시스가 죽고 만일 앤드류라는 사람과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앤드류가 됩니다. 자기의 재혼 횟수만큼 새 남편들의 성이 거듭 붙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나라 문화의 한 단면으로, 이혼과 재혼이 크게 불명예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의 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자의 성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여자가 범죄행위를 하다 순경한테 잡히면, 순경은 그녀의 이름 두 가지를 묻습니다. 현재의 이름은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을 확인해서 적고, 또 처녀 때 이름을 묻습니다. 그래야 처녀 때 어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가에 대한 신원조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을 간다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감정에 의하면 얼마나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를 떠나서 생각해 보아도, 성을 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굉장히 큰 불편을 줍니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주로 성을 부르잖아요. 한 여자가 케네디로 불리면서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고 합시다. 만약 이 여자가 오나시스라는 성을 가진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케네디 오나시스로 불릴 경우, 그 케네디 오나시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자기의 명성을 떨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좀전에 온돌의 과학성을 이야기할 때 예로 들었던 몰리 교수 남편의 성이 몰리 번햄(Burnham)이었습니다. 몰리 교수가 공식적으로 우리 대학에 올 때 이력서에는 닥터 몰리라고 적혀있지 않고, M.W.Burnham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젊었을 때, 자기 남편 번햄과 이혼했습니다. 남편이 폭력도 심하고 하여튼 괴퍅해서 남편을 원수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에게 하도 많이 당해서 세상의 남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인 그녀의 공식적 이름이 번햄 교수입니다. 시간표에도 번햄으로 표기되어 있어, 학생들도 모두 번햄 교수라고 부릅니다. 그 원수 같은 남편과 이혼해서, 자기 혼자 대학에 들어가 공부해서 교수가 되었는데도, 자기를 부르는 것은 공식적으로 번햄입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절대로 자기를 번햄이라고 부르지 말고, 몰리로 불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번햄 녀석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데, 자꾸 자기를 번햄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몰리 여사라고 부릅니다. 그게 바로 서양의 퍼스트레이디 문화에서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핍박받는 여성문화의 한 양태입니다. 

 

지금부터 한 백년 전, 그러니까 1870년대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그 입센의『인형의 집』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줄거리는 여러분들 다 알겠지만, 주인공 '로라'를 남편이 예쁘게 생각하다, 어떤 일로 인해 자기 명예에 손상이 가려고 하니까 로라를 구박하고 이혼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문제가 해결되어 다시 부인을 전처럼 사랑하려고 합니다. 즉 남편 헤르더가 부인을 한낱 노리개로서 인형처럼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 때 로라는 가출하게 됩니다. 자기의 삶을 찾아서 가출한 것입니다. 이 책이 나오자 두가지 논평으로 논쟁이 붙었습니다. 하나는 여성해방의 바이블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이었고, 또 하나의 논평은 가정파괴의 비윤리적이고 퇴폐적인 소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불과 100년여 전에 있었던, 서양의 남녀관계를 차별적으로 드러내주는 한 사건이었습니다. 

 

서양사람들이 퍼스트 레이디라 해서 여자에게 차도 먼저 타게 하고, 식당에 가서도 의자를 꺼내주면서 여자들을 먼저 앉게 합니다. 이런 걸 보고 서양사람들이 여자를 우대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결코 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택시 타는 것만 얘기하더라도, 남자가 일등석에 앉기 위해서 여자를 먼저 타게 하는 것입니다. 승용차에서 일등석은 운전사 뒷자리의 옆자리입니다. 택시의 문을 열어주면, 여자들은 한참 구부려 기어들어가서 운전사 바로 뒷자리에 앉습니다. 2등석의 불편한 자리에 앉게 됩니다. 내릴 때도 남자가 먼저 내리고 난 다음에 구부려서 한참 기어나와서 내려야 됩니다. 이 때 잘못 내리다가 손잡이에 머리가 받치면 대개 혹이 납니다. 혼자 탈 때 여러분은 안쪽에 기어 들어갑니까? 안들어갑니다. 한결같이 일등석에 앉아 갑니다. 남자들이 일등석에 앉기 위해 문을 열고 여자들을 구석자리로 밀어넣는 것이, 마치 여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인 예를 든다면 정조대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에는 정조대가 없습니다. 중세 십자군기사들이 전쟁터로 나갈 때 정조대를 자기 부인에게 채웠다고 합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정조대가 실제로 있고, 제가 가지고 있는 백과사전에도 정조대 사진이 나와 있습니다. 정조대는 가죽과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한번 잠궈버리면 다른 남자와 성적 접촉을 가질 수 없도록 아주 치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자들이 정조대를 차는 부분은 가장 부드럽고 연약하고 또 민감한 그런 부분이죠. 그 부분을 거칠고 억센 금속으로 가두어 둔 것입니다. 그 부분은 가장 깨끗하게 해야 되고, 가장 소중하게 관리해야 되는,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런 곳을 금속으로 된 자물쇠로 채워놓고 갑니다. 그러면 그 남자가 전쟁터에서 일주일 만에 돌아옵니까? 한달 만에 돌아옵니까? 1년 만에 돌아옵니까? 언제 돌아올 지 모릅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여성들은 정조대를 찬 채 대소변을 가리면서 짐승처럼 견뎌야 했습니다.

 

적어도 정조대와 같은 가학적인 여성문화는 우리나라에 없었습니다. 아까 말했지만 여성의 성(姓)을 존중했을뿐만 아니라 남자를 호칭할 때도 여성 중심으로 불렀습니다. 어른이 되면 이름을 부르지 않고 택호를 부르는데, 택호는 순전히 부인의 친정 고장의 지명에서 따옵니다. 내가 만약에 솔뫼라는 마을에 있는 처녀에게 장가갔다면, 나를 부르는 택호가 우리 마을에서는 '솔뫼' '솔뫼어른' '솔뫼할아버지' 등이 됩니다. 마누라의 친정 지명이 곧 나를 부르는 호칭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로 장가갔다는 것, 내 아들의 외가가 어디라는 것이 다 알려집니다. 여러분, 하회마을이나 어디 종가집에 한번 가보세요. 종가집의 대문을 턱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입니다. 그런데 안방주인이 거처하는 안채는 대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거나, 중문을 몇차례 더 지나 저 안쪽의 아주 아늑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주 보호받는 공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둑이 들어오든, 거지가 들어오든,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오든, 바로 대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사랑채의 남자들입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저 안쪽의 공간에 여자들의 안채가 있는 것입니다. 안채가 있는 공간에 다시 뜰이 있습니다. 안채에는 마당이 있고 정문이 있고 장독대도 있고, 안채의 대청과 안방은 사랑의 대청이나 사랑방보다 규모가 더 큽니다. 그럴뿐만 아니라 우리가 옛날이야기 속에서 추측할 수 있는 여성들의 공간은 연당 안의 별당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규수는 바로 연당 안에 거처했습니다. 집안 후원에 못이 있고, 그 못 안에 별당을 지어 거기서 천자문을 익히고 바느질도 배우고 부덕도 닦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간남자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공간에 규수들이 거처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여성을 가두어 둔 것이냐 보호한 것이냐 라는 문제는 더 따져보아야겠지요. 오늘날 대도시 주변의 공단에 가보면, 여성근로자들이 공장일을 하면서 공장감독자들에게서 모진 말도 듣고 기합도 받습니다. 또 밤늦게 삼교대하느라 출퇴근하다가 깡패들한테 폭력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과 조선시대 때를 비교해보면, 여자들을 핍박하려고 별당 안에 거처하게 한 것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존여비편견이 과연 우리만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민족문화의 한 부끄러움인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퍼스트레이디를 표방하는 서구문화의 남녀차별보다 여성을 상대적으로 존중했던 것입니다.

  

 

 

접으며

 

너무 장시간 이야기했고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여러분들에게 혼란만 준 것 같습니다. 또 제가 한 이야기 중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 점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런 것들에 너무 몰입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지금이 쇄국정책을 펴던 대원군 시대 같으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때는 널리 문화를 개방하여 서양문화를 여러모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른 시대입니다. 지금은 범람하는 외래문화 때문에 우리 문화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수용과 모방으로 인해 우리 문화의 상당부분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민족문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한 것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해당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우리가 지나치게 민족문화에만 몰두해 있는 경우라면, 우리는 이웃 문화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제가 다시 이야기를 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기성세대처럼 편벽된 시각이나 경화된 관념에 사로잡혀있지 않은 젊은이들이니, 제 이야기를 융통성있게 받아들이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오늘의 주제와 반대되는 주제로 다시 강연할 기회가 온다면 얼마나 신바람날까 엉뚱한 상상을 해보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 약 력 

영남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문학박사(민속학) 현 안동대 교수(민속학) 현 정신문화연구원 구비문학 조사위원

저 서

 

꼭두각시 놀음의 이해, 민속문화론, 전통상례,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 한국민속과 전통의 세계, 한국구비문학세계(7-9권) 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