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수행깨달음의 음계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17 13:28:14    조회: 2,099회    댓글: 0

 

깨달음의 음계

 

- 다 프리 종

 

'깨달음이란 무엇인가(What is Enlightenment?)-존 화이트 편저'라는 책의 내용중 '다 프리 종의 강연'이라는 글을 올려 볼까 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그 무엇을 제시하고 있지는않습니다. 다만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럼 한번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다 프리 종 :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영적인 수행자 집단인 <TheJohannine Daist Communion>의 창시자이다. 그는 1939년 뉴욕에서 태어나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다음, 몇 군데의 신학교를 거쳐 스와미 묵타난다를 비롯한 요기들에게서 요가를 배우고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 신비 현상의 전모를 체험했다.

 

1970년 초월의식과의 합일을 실현한 이후로 그는 세계 전역에 자신의가르침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첫 저서는 자전적인 책인 <무릎꿇고 듣다 The Knee of Listening>이다. 그가 쓴 책으로는 다음과같은 것들이 있다. <The Enlightenmentof the Whole Body>,<Scientific Proof of the Existence of God Will Soon BeAnnounced by the White House!>, <Easy Death>, <TheDreaded Gom-Boo or the Imaginary Disease That Religion Seeks toCure>, <The Transmission of Doubt>. 속세를 포기한 은둔자로서 그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 집단과 함께 푸지섬에서 조용히 살고 있지만, 가끔씩 세계 각국에서 추종자들이 모여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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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구 作 '소우주' 

 

1.

 

그대들이 살아 있을 때는 삼라만상이 모두 중요해 보일 것이다.

 

심지어 어떤 중요한 일이 자기한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절망감까지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은 온갖 중요성으로 꽉 차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우주 전체가 그대들에게 중요하게 보이는 것을 포기하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은가? 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은 그대들이 경험을 완수하도록 요구하는 동시에 경험을 초월하도록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대들의 삶은 시시각각으로 이러한 충동을 함께 지니게 되는 것이다.

 

삶은 엄청나게 불합리하다. 살면서 그대들은 이런저런 경험을 갖겠지만, 모든 경험은 모름지기 초월이나 경험으로부터 벗어날 필요성을 담은 궁극적인 메시지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우선 불필요한 것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왜 그런일로 시달려야 하는가? 깨달음은 경험의 심각성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거나 파괴하는 일이 아니다. 절망도 심각하고자살도 심각하다. 방종도 심각하고, 스트레스를 느끼면서까지 해야만하는 노력도 심각하고, 수련도 심각하고, 이해관계도 심각하고, 지식도 심각하고, 죽음과 섹스와 음식 모두가 심각하다. 살아남으려는 운동, 독립된 형태로 남아 있으려는 성향은 깊이깊이 심각하다. 그런데 그것이 초월되어야 한다니 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깨달음은 신성한 흥興으로 되돌아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경험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대들은 그 경험에 정신이 팔려서 반복하든지 아니면 초월하든지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전자인가, 후자인가? 경험을 초월했다면, 이제 그만이다. 그렇다면 그 경험이 지속되든그렇지 않든 전혀 중요치 않다. 어찌 됐든 경험이라는 것은 모두가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지 않겠는가? 우리는 '의식'외부에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엄청나게 불합리한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우스운 가정에는 털끝만큼도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에서 독립된 세계란 없다. 세계는 의식의 변형이요, 의식에서벌어지는 놀이판이다. 그것은 아무런 독립적 실체나 필연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냥 가능성일 뿐이다. 어느 순간 가능성이라는 각도에서의식이 행하는 것은 실존이 가진 심각한 성향이 벌이는 드라마이다.

 

그것이 현상보다 높은 자기의 진정한 위상에 눈뜰 때, 그 자리에는 흥이 가득하여 아무런 경험도 필요치 않다. 오직 깨달음, 신성한자유가 존재할 따름이다.

 

그대들은 자기가 지금도 객관적인 사물을 체험하고 있다고 끝없이상상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대들은 어떤 대상을 제대로 보지 않고있다. 예컨대저기 걸린 등잔을 보라. 그대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저 등잔이 아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은 혹시 두뇌의 현상이 아닌가? 그대들은 저 등잔을 볼 수 없다.

 

저 등잔을 바라보고 있는 머리 속에 그대들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야릇한 두뇌의 현상은 저 너머에 등잔이 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어디인가? 반사되는 영상은 눈동자 주위에서 굴절을 일으키고, 신경 충격과 전류는 두뇌를 둘러싸면서 불꽃을 만들어서 환상과 감각과 생각을 구성한다. 여기에 객관적인 것이 정말 있는가? 그대들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각종 경험 기관들이 약간씩 덧칠한 그대들의 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마음이다. 그 자체로는 하나도 해롭지 않지만, 너무 마음을 빼앗기면 그대들의 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대들의 진정한 위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들은경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모든 경험과 맺는 올바른 관계는 초월 의식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거기서는 현상들이 필요에 의하지 않고 혼자 흥에 겨워서 일어나게된다.

 

경험적 현상과 맺는 그릇된 관계는 그대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계의 한복판에 있는 독립된 개인이요, 독립된 의식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세계가 그대를 둘러싸고 있고, 따라서 그대에게 객관적이며 그대와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경험은 대단히 심각한 일이 된다. 이제 경험에 항복하여 끝없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영적인 삶은 깨달은 삶이다. 그냥 깨어난 삶인 것이다. 깨달음, 제7단계(제7단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 참조-편자 주)에 이를 때까지 영적인 삶이란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전단계의 삶은 모두우리가 경험에 '직관적 진실'을 가져와서 이를 통해 그 차원의 경험을 초월하는 이른바 경험의 단계들이다. 

 

우리는 이 과정의 단계를 하나씩 거치면서 수많은 경험의 특징들과관련된 이러한 초월적 수행을 행하여 마침내 모든 가능한 경험이 초월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초월적 지위'를 회복하여 깨달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런 기질이 깨어나기에 앞서 이어지는 실존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이지 못하다. 실존은 깨달음이라는 견지에서 영위될 때만 영적이다.

 

그것은 곧 경험의 충동, 흥이 나지 않는 경험, 살아남으려는 욕구 따위와 싸우는 투쟁이다.

 

지속하려는 동기, 욕망을 채우려는 동기, 자의식을 지키려는 동기, 육신을 언제까지나 가지려는 동기가 그대들의 기본적인 실존 감각이다. 경험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대들이 지금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대들은 '초월적 실체'로 실존하고 있지 않다. 그냥 이 육체와 정신의 복합 존재일 뿐이다. 그대들은 그런 상태로 지속되고 싶어한다. 육체와 정신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갖고자 하는것이다. 결과적으로 만일 일시적으로라도 이 육체와 정신 복합체의 커다란 즐거움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대들은 즐거움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약간이라도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쾌감을 얻자마자, 그대들은 즉시 자기가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서 실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에는 현상의지속을 위한 여하한 투쟁도 없다. 현상을 지속시키기 위한 강제적이거나 근원적인 노력이 없는 것이다. 그냥 현상만 존재하고 경험의규약들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불필요하고 (우리에게) 일시적이며 해롭지 않은 수정된 의식들이다. 그 '의식'은 독립된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아무 조건을 갖지 않는 초월 존재이며 깨달음이다. 깨달은 개인은 더이상 분리된 영혼-의식에 맞지 않는다. 그 자체로 살아남으려 하거나무언가 다른 것이 되려하는 개별적인 자아는 이미 너무 비좁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살아남으려는 동기가 이미 스러진 다음이다. 육체적 실존의 연속성은 자발적이므로 지속하려는 심리적 동기에 더이상의존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될 따름이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육체적 실존이 그냥 종말을 고한다. 필요하지도 않고 궁극적인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주는 궁극적이지 않다. 그것은 거대한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은 극히 범상하고 불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무한수無限數의 가능한 경험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하나가 우연히 일어나고 있을 뿐, 다른 모든 것도 역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대들은 이 경험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어느 정도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하려고 결심한다. 만일 그런 요구를 조금이라도 늦춘다면, 전혀 다른 어떤 것이 곧 일어나고 말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전혀 다른 것을 두려워한다. 죽을까봐서 두려워하지 않는가? 사물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은 현재의 경험에 매달리는 것이다.

 

만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반사 행동이 아닌 초월적 깨달음을 통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때 그대들에게 흥이 되살아나고 색다른 실존감이 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대들은 이 현재의 경험이 그냥 일상의 인과관계를 통해서 일어났다가 때가 되면 끝나는 것일 뿐 아무런 필연성도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고 경험하는 것은 현재, 절대적인 '실존의 순간'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과거이다. 모든 경험은 과거이다. 새로운 것은 없다. 경험의 주체인 마음에 대해서 실제적이라고 말할 아무 것도없다. 마음은 고작 기억이고 과거의 연상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무 것에도 반응하지 못한다. 기계적인 패턴의 기록이다.

 

몸은 마음과 정확히 똑같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생각을 많이하기 때문에 마음이 몸과 전혀 다르다고 상상한다. 사실상 몸과 마음은하나이다. 동시적이다. 마음이 과거의 연상聯想이듯이 몸도 과거의 연상이다.

 

몸은 과거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 보고 있는 빛이 지금부터몇 광년 전에 발원지의 별을 떠난 경우와 비슷하다. 그 별의 현재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별이 너무 멀리 떨어져서 발사한 빛이 도달하려면 영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몸도 먼 과거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의미를갖지 못한다.

 

우리가 '현재'를 '깨달을'수 있기 이전에 몸은 반드시 초월되어야 한다.

 

그러한 '깨달음'은 오로지 삶의 제7단계에서만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가르침들을 읽고 생각하며, 그리하여 자신들이 이미깨달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전통적인 관념에 얽매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깨달음에 필수적인 육체적인 '희생'이 되지 못한 것이다. 깨달음은 개념상의 이해가 결코 아니다. 

 

비교적 고요한 상태의 마음가짐만도 아니다. 깨달음은 문자 그대로 몸과 마음을 초월하는 실존의 절대적 '조건'이다. 근원적인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몸과 마음이란 없다! 따라서 제7단계에 들어서려면 가장 심오하고도 끔찍하기까지한 변혁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사건은 약간의 생각으로 그냥 창출될 수 없다. 몸과 마음, 영혼, 그리고 경험이 불필요해지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3.

 

무수히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기껏 오늘 기분이 좋으면 깨달았다고생각한다. 그 같은 평범한 쾌감은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절대로 생각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깨달음에는 합리적인 정당화나 합리적인 정당화를 낳는 논리적인 사고 작용도 없다. 깨달음은육체 및 정신적 실존이 갖는 모든 심각성과 필요성을 벗어난 자연스럽고 절대적인 초월적 '깨어남'이다. 따라서 죽음, 경험의 중단, 정신상태의 단절, 육체의 소멸, 세계의 파멸 따위도 더이상 위협이 아니다. 오히려 없어야 좋다. 모두가 엄청나게 두려워하는 그 모든 끔찍한 운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깨달은 존재는 아무 것도 무섭지 않다. 그는 웃고 있다. 자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자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가습관적으로 분열된 위치로부터 누리는 세계관으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신성한 실체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야말로 실존이다. 깨달음이 사실화 되려면 그것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한 경지에서는 '신성한 인간'이 말없이 존재한다. 그대들이 지금 육체적인 삶과 경험을 느끼는 것만큼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눈뜨고 나면, 경험의 현상은 더이상 불필요하다. 현상은 이 순간만 지속될 따름이지, 이제 우리를 속일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제7단계(부록 참조)에 이르기까지 거치는 삶의 모든 단계들은 이런 저런 경험의 심각성으로 인한 분산의 단계들이다. 경험을 초월하는 과정은 가장 낮은단계에서 시작되는데, 거기서 겪는경험은 육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음식에 대한 깊은 집착,성적인 방종에 대한 갈증을 담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이런 경험들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은 실존 스펙트럼의 최저 단계에서살아간다. 요기들과 신비가들, 성자들은 모두 경험적 내면성에 매달린다.

 

통찰, 머리 속에서 번쩍이는 빛, 두뇌 한복판의 진동, 아무 생각도 안 나는 무한한 평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경험도 없는 상태가 바로 경험적 내면성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수준이 높든 낮든 앞의 여섯 단계들(부록 참조)에서 인간의 삶에서 일어날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영적으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삶의 각 단계를지나면서 각각의 분산 경험 단계에 이를 때마다, 우리가 반드시자기 초월을 실현해야 하고 몸 전체가 초월 의식에 굴복해야 한다는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한 자기 초월을 논외로 한다면 처음 여섯 단계의 단순한 성숙은 불합리하고 억지이고 근본적으로 대단히심각하다. 처음 여섯 단계의 각각에 깃들인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육체와 음식, 섹스, 생각, 영혼의 인식, 높은 정신적 유혹, 내면의 고요까지도 그런 처음 단계의 실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의미를 가진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제7단계, 깨달은 단계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거기서 우리는 삼라만상의 초월 상태를 고향을 만나듯이 만난다. 경험적 실존에 관해서 심각한 것이라곤 전혀 없다는 고요한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 그런 종말 자체는 조금도 중요성을 가질 수 없다. 아니면 그것은 무한한 경험의변환 작용을 통해서 영겁의 세월 동안 지속될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에 깃들인 기질이며, 삼라만상의 불필요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심각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아무 것도!절망과 신경증에 빠져 있는 평범한 반사적 인간성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대단히 심각하다. 깨달은 사람은 자유 전체를 실현시킨다. 그는 더이상 심각하지 않고,그렇다고 자기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무아경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억누르거나 고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존재 전체가 '초월 의식'안으로극복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흥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세계에 공격적으로 맞서지 않지만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의 가슴에 도사린 모든 긴장이 풀린 것이다. 그러한 징표를 건드리지 않고 깨달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모든 심각성, 현상에 대한모든 집착에서 가슴이 해방되지 않은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신비한 현상까지도 웃기는 일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환각이요, 환상이다. 그대들 자신의 몸과 마음과 머리가 만들어 내는 헛그림자일 뿐이다. 그대들 자신이 간직한 심각성이 빚은 결과일 뿐이다. 

 

그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절대로 행복의 샘이 아니다. 그것이 정신적이거나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사건이든 아니면 육체적인 관점에서 보다 낮은 차원의 사건이든 모든 현상은 심각하며,따라서 불필요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행복은 찬란한 초월적 의식에 내재한다. 그 실체가 실현되었을 때, 내재되어 있던 행복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상은 아무런 독자적 삶이나 자유를 줄 수도 없다. 깨달음의창으로 보면 모든 현상이 영원한 행복을 보여주는 극장에 불과하다. 영화는 계속될 수도 있고 그만 그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매달리는 그대들의 심각한 일들은 모두과거의 부조리한 표현이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내면에 한계를 지우는 방법일 뿐이다. 결국 모두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건절대 부정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말이 아니다. 우리는 신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하여 찬란한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절대의식'의 '찬란한 희열'을 실현해야 한다. 우리는 꼭 사랑이 되고자유가 되고 흥겨움이 되어야 한다. 그때, 과거의 모든 것은 스스로 용해된다. 마음은 과거이므로 마음도 스스로 용해된다. 몸은 과거이므로 몸도 스스로 용해된다.

 

범상한 사람에게는 몸이 미래로 들어가는 과거이다. 그런삶에는 현재가 없다. 온갖 경험을 하느라 현재에 눈을 뜰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는 '초월적 실체 자체'가 바로 현재인 것이다. 그대들은 생생한 욕망에 집착하는 통속적인성향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대들은 삶을 바라보는 낭만적인 향수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대들은 온갖 경험을 바라는 저속한 욕망에서깨어나야 한다. 그대들은 세계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논리적 일관성과의미를 찾는 차가운 지성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들은마음과 가슴에 달린 모든 자물쇠가 풀리고 긴장이 사라진 진정한 위치로 돌아 와야 하는 것이다.

 

생생한 경험, 환상적인 감정 경험, 정신적 성취에 대한 집착을 낳는 것은 가슴에 담긴 긴장이다. 그 모든 것은 주관적인 오락에 불과하다. 가슴속의 긴장이 해소되었을 때, 몸과 마음에 더이상 매달리지 않고 거기서 나오는 경험 가능성에도 매달리지 않게 된다. 몸과마음이 고개를 쳐들면 그대로 좋고, 고개를 쳐들지 않으면 그것도또 그대로 좋다.

 

 

 

4.

 

신의 축복을 받는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할 때, 그대들은 자유를 실현하고 '은총'을 받는다. 은총이란 그대들이 이미 신의 품안에서휴식을 취함으로써 누리는 흥겨움이다. 은총은 삶에서 모든 종류의성공을 성취하는 일이 아니다. 성공이 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경험이라는 장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은총은 우리가 신의 품에서 편히 쉴 때 다가오는 해방감이다. 그때가 되면 마음의 온갖 자물쇠들이 풀리고 경험의 심각성이 쫓겨난다. 그대로 찬란한 빛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일이 행복이 된다는 뜻이다. 영적인 과정에 들어서는 우리의 능력이 강화된다. 우리는영적인 삶을 영위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자아 초월의 과정이 가속화되고, 그에 따라 우리도 보다 높은 변혁의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깨달음이 바로 아무 원인이 없는 뿌리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제 신과 절대적 은총의 품에서 누리는 휴식만이 있을 뿐이다. 세계와인간도 무한 속에 떠다니게 된다. 몸과 마음에는 아무런 긴장도 없고환상도 없다.

 

이 강연의 핵심은 여러분 모두가 흥과 자유를 실현하고 매일같이이해관계와 바쁜 일의 심각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의 평범성과 불합리성을 보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취해선 안 된다. 우리는 세계에서 벗어나 초월 의식에서 자연스럽게쉬어야 한다. 그대들이 신의 품안에서 쉰다면, 이미 은총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은총은 그대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궁극적인 초월을 위하여 봉사하게 된다. 만일 그대들이 신의 품안에서 쉬게되지않는다면, 가슴이 돌덩이나 꽉 쥔 주먹처럼 되고 만다. 의식의 무한한빛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연민이고 자기방어이다. 생존과 위안과 쾌감을 얻으려고 경험을 반복하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유일한 행복은 가슴의 해방 내지 차별없는 자아이다.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자아는 마치 꽉 쥔 주먹과 같다. 주먹을 펴보라.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자아감각도 몸과 마음의 긴장일 뿐이다. 그것이 몸과 마음에 독립된 감각을 부여한다. 그 긴장을 풀라. 그러면 몸과마음이 투명하게 될 것이다. 자아가 없어진 것이다. 경험 속에서 자아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 '깨달음의 징조'같은 특별한 경험과 연관되어있지도 않다. 평범한 눈으로 본다면 깨달음이란 분리된 자아의 소멸이다. 하지만 깨달음은 그런 자아가 없고 있었던 적도 없음을 깨닫는것이다. 지금 존재하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에는 그런 자아란 없고,자기 자신을 초월한다거나 깨닫고자 노력할 때도 그런 자아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깨달음이란 역설적이다. 그것은 육체적 성향을 갖는다. 왜냐하면그가 습관상 육체를 빌려 나타나며, 따라서 과거를 표현하고 미래를향한 운동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의 의무는 다른존재들의 깨달음에 봉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다른존재들이란 없다. 그들은 찬란한 초월 의식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것은 구속 상태와 생존욕구를 표현하는 관습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피상적인 개념이다.

 

모든 존재들은 이런 속박과 생존의 개념 언저리에서 복잡하게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이런 개념들에 근거한 동기들을 가지고 일상의 삶을 만든다. 따라서 모든 존재들이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이지만, 그 고통도 역시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이다. 삶의 온갖 일은 불필요하지만 불가피하다. 그런 상태를 묘사할 말로 '불합리', '부조리'만큼 좋은 말이 어디또 있겠는가! 우주 전체와 모든 경험은 다만 초월되기 위해서 존재하는것이다.

 

다른 모든 것처럼 영혼의 스승도 불합리하다. 그는 불합리하고전혀 불필요한 이런 조건으로부터 존재들이 깨어나도록 도와주는 '기능'이다. 그의 일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일이나 터무니없이 불합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흥이 필요하고 깨달은 눈이 필요한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나에게 왔으면 온 책임을 져야 한다. 무책임한 사람은 깨달을 수 없다. 깨어날 수도 없고 가르침을 들을 수도없다. 그런 책임이 다 이행되고 나면, 그때 우리의 모임을 위한 올바른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모임도 진정 깨달음을 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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