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가득한 우리 문화 아름다운 우리 역사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5-07 14:29:30    조회: 1,599회    댓글: 0

 

향기 가득한 우리 문화 아름다운 우리 역사

박성수/역사학자 

 

단군은 어디로 가셨는가?

 

지금 우리 역사는 그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없다. 이래서 되겠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속에서 잠자고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역사의 절반이 없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보다 더 한심한 일은 역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의 대세 특히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는 과거보다 미래, 국가나 민족보다 세계와 인류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경향이 강해, 역사 특히 우리 민족사쯤이야 없어지건 사라지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미래지향적인 사고의 조장은 지난날의 서구중심주의의 사관을 교묘하게 변조한 것이며, 지난날의 제국주의 정치가 문화제국주의 내지는 문화식민주의로 바뀌어 현실을 호도하려는 술책이란 사실을 망각한 소치이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그 나라 그 민족의 자존심을 보장하는 족보요 이력서임에 변함이 없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유난히도 족보를 중시하여, 수재나 한재 그리고 전란을 당해 피난길을 떠나야 할 때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족보를 먼저 챙겼다. 그 때 가지고 갈 족보는 미리 준비된 간이족보였다. 집집마다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적게 줄인 휴대용 족보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족보는 우리에게 귀중한 가보였던 것인데, 어느덧 이 민족은 족보를 무시하고 자기 역사를 소홀히 다루는 식민지 백성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민족이 없는데, 인류가 무엇이며 세계가 무엇인가? 잘 간수하여야 할 때인데도, 시대를 착각하여 자기 역사가 왜곡되고 없어진 것을 모르고 그날그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돈과 재물만 탐하는 민족으로 변한 것일까. 

 

가장 슬픈 일은 국조 단군이 역사의 실존인물이 아니라 신화라고 하는데도 가만히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는 적어도 5천년 아니 6천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의 상고사인 삼황오제 그리고 요순시대가 우리 동이족의 역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 역사로 말하면 환웅의 신시 시대와 단군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중국의 역사가,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한국인의 조상의 역사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거기다 더하여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만 알려지고 있던 금사金史와 요사遼史 그리고 청사淸史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한국의 역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소위 반도사관이라 하여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서 활동한 사실만을 한국사라 잘못 알고 지냈었는데, 대륙에서 활동한 사실도 우리 역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들리는 정보에 따르면 지금 중국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한국의 역사까지 중국사로 편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업이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어 아직 일부 역사가들만 알고 있을 뿐 아무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도 단군을 말살하지 못했었다

 

옛날에 우리 역사는 단군조선부터 시작되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비롯하여 『아희원람』兒戱原覽이라는 서당 교과서에도 그 서두에는 반드시 단군이 나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단군을 부정하는 자가 있다면 국시를 위반하는 범법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단군을 운운하는 사람을 도리어 국수주의자요 보수주의자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으뜸가는 국경일인 개천절을 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단군 말살을 기도하고 있는 일부 인사들은, 단군을 주장하는 사람을 지난날 군사정권에 야합하고 민주화에 반대한 사람들처럼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기 연호를 폐지하고 서기를 우리나라의 공식 연호로 바꾼 자가 누구인가? 유수의 민족대학의 경영권을 외래종교 지도자에게 넘겨준 자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군사정권과 이를 등에 업은 반민족주의 세력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1960년대에 단군성전건립을 결사반대한 기독교 세력과 당시의 군사정권이 협력하여, 단군을 신화요 귀신으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지난 날 일제가 단군을 말살하였다고 하지만 단군의 실제를 부정하지 않고, 단군은 평안도 한 지역의 시조라고 격하시켰을 뿐이다. 일제식민사학자로 유명한 금서룡今西龍이란 자는 「단군고」檀君考란 박사학위논문에서 단군을 북한의 한 지역의 시조이지 민족전체의 시조가 아니라고 썼다. 그리고는 3년도 못돼 천벌을 받아 죽었다. 

 

단군을 반대하면서 스스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1989년 여름 필자가 처음 백두산 천지에 올라갔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일단의 외래종교 간부들이 천지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닥치더니 큰 바위덩어리가 굴러 떨어져 모두 산을 내려갔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가 지하에서 울고 있다

 

일제 때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한 역사가들을 민족사학자라 하여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제는 단군을 말살하려 들었으나, 결국 말살하지 못하고 지역민의 시조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인의 뇌리에서 단군을 지워버리려 했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났던 것이다. 한국인이 단군을 잊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인이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 때 자칫하면 일본인으로 동화同化될 뻔하였다. 만일 그랬더라면 우리는 필리핀이나 인도처럼 자국어를 쓰지 못하고, 자국사를 알지 못하고 남의 말, 남의 글 그리고 일본사를 우리 역사로 알 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문화침략에 정면으로 맞선 분이 바로 민족사학자였으니, 그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외로운 항일 역사전쟁을 했던 것이다. 그 분들 중에 한 분이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이다. 

 

단재 선생은 단군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차디 찬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셨다. 그런 단재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 역사는 남이 망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손으로 망쳤다"고 하면서 통탄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 역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우리역사를 쓴 사람들에 의해 더 많이 없어져 버렸다. 특히 그들은 귀신도 하지 못하는 땅 옮기기의 재주를 부려 아사달을 떠다가 황해도 구월산으로 갖다 놓음으로서, 우리의 강역을 압록강 이남으로 줄이고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는 식의 역사를 만들었다." 

 

단재는 또 '조선시대 사대주의 역사가들이 우리 강역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성까지도 문약했던 것으로 착각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낮추는 소위 춘추필법을 배운 조선시대 사람들은, 삼국시대의 사람들까지도 문약에 빠지고 편안히 소국에 살기를 바랐던 사람들처럼 그려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무강한 민족이었다." 

 

지금 우리 역사책을 읽어보면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문약에 빠져 외적과 싸워서는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백전백패하는 패배자의 역사로 그려 놓았다. 무강武强하였던 우리 민족의 본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대국에 아첨하고 우리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는 한심한 민족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심지어는 무강武强이란 단어 자체를 잊어버리고 문약文弱이란 말만 알게 되었다. 그러니 누가 조국을 진정 사랑하겠으며 조상에게 감사하다고 절을 하겠는가. 

 

요즘 조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 가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보도를 읽고, 우리나라는 벌써 망했다고 생각했다. 왜냐 하면 홍암 나철(羅喆, 1860∼1916)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것은 몸뚱이의 죽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죽고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백암 박은식은 금사金史까지도 우리 역사라 했다

 

백암 박은식(朴殷植, 1859∼1926)은 단재와 더불어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신 민족사학자의 한 분이다. 그의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일제침략자들을 놀라게 했다. 일제는 이 책이 나온 것을 보고 단군말살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이 책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충격의 저서였다. 박은식 선생은 압록강을 건너 대륙 땅을 밟았는데, 알고 보니 그곳이 중국 땅이 아니라 우리 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역사의 노래'(歷史歌)를 지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우리 나라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가 아니라 대륙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 민족은 절대 문약하지 않았다. 

 

어화! 우리 청년들아 / 고국산천이 만주대륙 땅이라. 

북부여의 단군 자손 / 2천년이나 나라 지켰네. 

 

동명성왕 북진하여 / 고구려를 건국하고 

압록강 건너 국내성 찾아보니 / 광개토대왕 비석 우뚝 섰네. 

 

용천부(발해진)를 돌아보니 / 발해 태조의 사업이 역연하고 

우리 동족 금(金)태조는 / 백두산에 터를 닦아 

 

2천5백 정병으로 / 천하를 호시하니 굉장하구나. 

우리 오늘 건너온 일 / 상제 명령이 아닐런가. 

 

아무쪼록 정신 차려 / 조상 역사 계승하세. 

 

"아무쪼록 정신을 차려 조상의 역사를 계승하세." 이 말은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한 마디가 아닌가. 정신을 차려라. 

최근 서울 역전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어깨띠를 한 아주머니들이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일본의 천리교를 믿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천리교가 어떤 종교인데 백주에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귀신을 믿으라고 하니 기절할 일이 아닌가. 

 

 

양궁洋弓이 들어오기 전에 단궁檀弓이 있었다

 

일제 때까지만 하여도 우리는 단군을 잊지 않았었고 단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애국자가 많았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해외에 흩어져 있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해에 집결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해마다 10월 3일에 개천절, 3월 15일에 어천절을 기념했다. 만일 우리가 단군의 후손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에서 개천절을 기릴 이유가 없었다. 독립운동을 할 하등의 까닭도 없었다. 우리가 단군의 후손인 배달민족이 아니었다면, 청산리 전투에서 왜적과 싸워 목숨을 바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해방을 맞이하여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개천절을 으뜸가는 국경일로 정하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경축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지금 환웅으로부터 비롯된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귀중한 가르침을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학교에서도 홍익인간이 단군의 가르침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없다. 교육이념을 정해놓고 가르치지 않는 나라도 우리 나라 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5천년간 지켜오던 단군의 역사를 불과 50년만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교육제도 가운데 가장 잘못된 부분은 영어 교육을 해서가 아니라, 국민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 국민교육을 하지 않고 시민교육만 하려 드는가. 나라 없이 어디 시민이 있을 수 있는가. 국민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이민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미친 듯이 해외로 이민 가지 않는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가 배우고 있는 교과서를 보라. 단군조선은 그 실체가 의심스럽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역사는 기자의 후손이 건국한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차마 신화(神話)라는 말을 하기 어려우니까, 긴가 민가 하는 애매한 표현으로 단군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불투명한 표현은 교사와 학생을 동시에 속이는 것이라고 어느 여교사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도대체 교육자와 피교육자를 동시에 속이는 교과서가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는가. 

 

아무튼 그 때문에 학생들은 우리 역사가 2천여 년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자나 석가 그리고 예수 이전에 우리 민족은 이미 훌륭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는데도, 그 부분을 부끄러워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가.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도 양심에 가책을 받는단 말인가. 옛날 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이 무서워서 기자를 만들어냈다고 하지만, 지금은 어느 나라가 무섭단 말인가. 

 

얼마 전 필자는 천안의 국궁사격장에서 현지의 교사들에게 우리 국궁이 세계 제일이란 말을 하고, 우리 국궁이 단궁檀弓에서 시작되었다고 강조했다. 강의하는 필자만 열이 났을 뿐 듣고 있던 선생님들의 반응은 냉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수많은 선생님들은 영, 수, 국 세 과목을 잘 가르쳐 학생들의 대학 입학률을 높여야 할 긴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 분들에게 우리 국궁 이야기가 귀에 들어가겠는가. 

 

일부 선생님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아이들이 영어공부를 잘해서 하루 속히 미국으로 유학하거나 아니면 이민 가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인데, 이 같은 바램을 무시할 수가 없다. 교사는 모름지기 학부모들의 요망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설사 교사들에게 애국심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국사나 국어 같은 과목에 관심이 없는 학부모와 학생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한번 다시 생각해 보자. 

 

 

 

단군을 받들어야 단단하고 탈나지 않는다

 

일제 때 우리는 우리 역사와 우리말을 잃을 뻔하였다. 아니 잃기 직전에 가까스로 국어와 국사의 목숨을 건졌다. 일제식민통치 36년만에 해방을 맞아 우리 역사와 문화를 되찾았던 것인데, 지금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광복절이 왜 국경일인지 아는 학생이 절반밖에 안된다는 통계가 나오자, 가장 좋아했던 나라가 일본이었다. 

 

일제 때는 강압에 의해 할 수 없이 그랬다 치더라도, 지금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5천년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한국인이 겨우 50년도 못가서 우리 것을 잊고 또 잃게 되었으니 이것을 제2의 망국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1945년 이전에는 군사적인 제국주의가 우리를 못살게 굴었지만, 지금은 문화적 제국주의가 우리를 없애려 들고 있단 말인가. 

 

세계화라는 말속에는 문화 제국주의의 비수가 들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식민주의이다. 지난날의 문화 사대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하늘님까지도 외국에서 수입하여야 할 식민지 근성을 조심하여야 하는 것이다. 햄버거를 먹는다고 해서 반드시 미국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노란 물감으로 머리카락을 물 드린다고 미국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식민지 백성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역사를 훔쳐 도망가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우리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단군을 말살하여 우리 민족을 일본민족 밑에 예속시키려 들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지금 당장 우리 스스로가 우리 역사를 버리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우리 문화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가장 큰 고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옛날 삼국시대에 단단탈탈가檀檀脫脫歌란 노래가 유행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불교가 들어와서 불교신자 늘어나자 "불교를 믿지 말고 단군을 믿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집집마다 단가檀家라 하여 단가끼리 서로 손을 맞잡고 단결하였다. 그리고 서로 만나면 상대를 단나檀那라고 불렀다. 단가는 그 뒤 '단골'이란 말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단나라는 말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일본열도로 건너간 우리 조상들이 이 단어를 긴요하게 썼다. 단나는 상대를 양반이라 높이는 경어이다. 

 

그러면 단단탈탈檀檀脫脫이란 무엇이냐. 단군을 믿으면 나라가 단단해지고 단군을 믿지 않고 석가모니를 믿으면 나라가 탈이 난다는 뜻이다. 배가 아프면 배탈이 났다고 한다. 나라가 건강하면 단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라가 병들면 탈났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단군 이래로 잘 입고 잘 먹고 잘 산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가난해지고 있는 것이다. 

서양문화에는 향기가 없다. 하지만 동양난이 그렇듯 우리 문화에는 향기가 가득하다. 향기 가득한 우리 문화를 되찾고 우리의 아름다운 역사를 되찾자. 

 

글쓴이 박성수 씨는 서울대 사대 역사학과를 거쳐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각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길렀으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을 역임한 후 한국정신문화원 편집부장으로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서 중국 속의 독립운동사적지 및 백두산, 발해사적지 등을 탐방하였다. 현재까지도 왕성한 연구 및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 월간개벽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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