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기원과 역사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6-19 00:29:02    조회: 1,880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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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대학 강의] 

 

한의 기원과 역사

 

- 김상일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나름대로 한의 의미를 발견했고, 85년도에 귀국하면서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는 단체나 학자들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한에 대해 연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 개념정의가 서로 다르고 접근방법도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는 동안에 우리것을 반드시 되찾아야 하겠다는 절실한 생각을 갖고 한에 접근해 왔기 때문에,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혹 저의 접근방법과는 다른 의견을 갖고있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과정철학의 기원

 

저는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것은 현대물리학을 철학에 도입시킨 소위 유기체 철학입니다. 과정철학은 19C말엽부터 조금씩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화이트헤드가 1940년도에 도미하여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이 유기체 철학인 과정철학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화이트헤드의 대표적 저서가『Process & Reality』 즉 과정과 실재라는 책입니다.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어보면,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은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플라톤 철학의 틀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 이후부터 전개된 서양철학의 방법론은 바로 이원론(dualism)이었습니다. 이것은 주관과 객관을, 인간의 몸과 마음을, 초월과 내재를 하나로 보지 않고,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입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 중, 어느 것이 먼저 있었느냐, 또는 어느 것이 어느 것에서 나왔느냐, 이렇게 보는 것이 서양철학의 기본틀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양철학의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 과정철학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철학의 출발점은 양자물리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하이젠베르그의 양자물리학에서, 그 물리학적 구조를 철학에 도입시킨 것이 과정철학입니다. 소위 현대물리학이 나오고부터 과거에 생각해 왔던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이 방안에 앉아 있으면 저쪽 방에는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어느 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 다른 곳은 부정당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원론이란 하나의 물체 A는 A이든지, 아니면 A가 아니어야 한다는 철저한 모순율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물체가 이방에도 또는 저쪽방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도깨비 논리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러한 A와 A가 아닌 것이 서로 대립된다는 모순율이 깨어지고, 서로 상보하는 논리로 전개되는 것이 현대물리학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주관과 객관문제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빠르다 느리다, 또는 길다 짧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주관에 따라 길고 짧은 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의 출발점이 아니겠습니까? 주관과 객관이 구별되어있지 않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 현대물리학이고, 현대물리학에 근거한 것이 과정철학이라는 이러한 시각으로 노자 도덕경이나 화엄경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벌써 모순대립의 논리는 깨어지고 모든 것을 상보 내지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구조가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一과 多

 

간단히 과정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했는데, 지금까지의 얘기는 제가 어떻게 한이라는 것을 포착하게 되었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Process & Reality』란 책에서, 존재의 범주와 궁극적 범주를 나누어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든 것의 가장 궁극적인 개념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플라톤처럼 being & nonbeing 뭐 이런 것들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거슬러 올라갔을 때, 궁극적으로 남는 개념은 '一과 多'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관념의 끝은 一과 多의 문제에 부딪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얘기하면, 가령 제가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 앞에 섰을 때, 대부분이 처음 보는 얼굴들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곳에 있는 다양한 100여명 이상의 개체들을 저의 개념작용이나 심리작용 등의 어떤 작용을 통해서, 하나로 묶으려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다양한 개체는 전체적으로 어떤 하나를 만들려는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을 하지 못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개념을 형성할 수 없고, 사고나 감정도 뒤죽박죽이 될 겁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보면서, 저에 대한 여러 요소들을 묶어서 하나의 원(oneness)을 만들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이나 정신질환자들이 사고작용을 잘 못하는 원인은, 一과 多의 유기적 관계를 잘 형성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여행하는 동안에 한가지 색깔 밖에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빨강색, 하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깔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착란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우주비행사처럼 한가지 색깔만 보게 된다면, 우리는 정신이상이 생기고 말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고작용이 一과 多를 끊임없이 상호교감시킬 때, 우리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궁극적인 범주(Catagory of Ultimate)가운데 一과 多라는 개념을, 영어로 하면 one과 many라는 개념을 들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철학이란 one과 nmany를 나누는 데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여러 다양한 개체들에는 하나의 공통된 개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one(공통된 개념)에서 다양한 개체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편과 개체특수, 절대와 상대, 주관과 객관 등이 서로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3세기경의 신플라톤주의 학자인 플라티누스는 이 궁극적 존재를 '一'이라고 했습니다. 이 一에서 '누스(nus)'라는 정신원리가 나오고, 누스에서 영혼이, 그리고 영혼에서 모든 존재가 생겨났다고 했습니다(流出說). 그래서 플라티누스는 이 一을 곧 신(神)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一에 가치를 부여하여, 一에 가까울수록 정신적인 것이 되고, 또 그것은 선한 것이라 했습니다. 반면, 一에서 멀어질수록 물질적인 것이 되고, 그것은 악한 것이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一과 多는 선과 악으로, 정신과 물질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원론의 생성근원을 따져보면, 결국 一과 多를 나누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는 一과 多를 표현할 때, 一은 남자 多는 여자, 심지어 一은 이성이고 多는 감정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과정철학에서는 一과 多의 문제를, 'one become many, many become one'으로 표현합니다. 화엄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一中多 多中一' 혹은 '一則多 多則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一과 多의 문제를 보는, 과정철학과 화엄불교의 시각(視角)이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一과 多의 관계로써 철학을 관찰해 본다면, 동서양의 모든 문제는 궁극에는 이 一과 多의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서양철학에서는 一과 多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一과 多의 관계를, '一이든지, 아니면 多이든지'라는 either or의 방법으로써 대립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극단적으로 '선이든지 악이든지, 또는 신이든지 세계이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헤겔은 一과 多를 변증법적 변화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즉 一과 多는 서로 대립되어 양립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一과 多는 서로 정반으로서 다이나믹한 작용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一과 多사이에는 유기적인 힘이 역동적으로 얽혀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유기적인 힘을 양력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一에도 힘이 있고 多에도 힘이 있어서, 서로 끌어당기면서 변증법적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서양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一과 多의 관계를 선이나 악의 관계로 보는 경우처럼,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하나를 반드시 배제해야 되는 그런 이원론적 관계로 파악하지 않은 사람이 헤겔입니다. 一과 多의 관계를, '一과 多는 상호작용함으로써 역사를 발전시킨다'라는 법칙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헤겔은 굉장한 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一과 多의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서 헤겔이 관념론으로 기울었다면, 맑스는 그것을 유물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두 사람의 철학세계에서 이런 차이 외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을 정리한다면, 플라티누스는 一과 多를 밝고 어두운 것으로, 선하고 악한 것으로, 또한 정신과 물질로, 이렇게 유출관계로 보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一과 多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either or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이에 비해, 헤겔은 一과 多의 관계를 either or가 아닌 both and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면 현대의 양자물리학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는 一과 多의 관계를 어떻게 볼까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one become many, many become one으로 보고 있습니다. 一은 多가 되고 多는 一이 되는, 곧 一과 多의 관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컨대, 여기 앉아있는 개체 하나하나가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체 하나하나는 곧 전체라고 보는 겁니다. 즉 전체적 개체요, 개체적 전체를 말합니다. 현대물리학의 아주 작은 소립자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수많은 입자들이 모여서 된 전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통일된 전체의 힘이 있어서 개체 하나하나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개체는 자기독자성, 자기개체성, 자기창조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 개체를 움직일 만한 전체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의 소립자 세계는 굉장히 democratic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화엄불교를 보면, 개미가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 속에서 사공이 노를 저으면서 고기를 잡았는데, 그 고기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세요? 이와 같이 아주 미세한 먼지하나하나에도 우주만물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실현하려는 바입니다. 만약 그런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노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사회에는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정보 같은 것도 필요없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정부상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개체는 완전한 독자적인 자기개체원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체와의 유기적 관계를 깨지 않는, 이것이 현대물리학의 소립자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개체는 一이면서 多이고 多이면서 一이라는 말의 참뜻입니다. 一이 없는 多의 세계는 무질서에 빠지게 될 것이고, 多가 없는 一은 독재의 세계에 빠질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무엇이 있다'라는 실재를 부정했습니다. 오직 '되는 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과정(process)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만이 있지, 고정된 실재개념은 없다는 것이 과정의 개념인데,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의 배경에서 과정철학을 실현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봅니다.

 

우리 한국학자들은 너무 한국철학에만 기울어져 있어서 과정분석철학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으로 보입니다. 한국학자들은 과정철학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 교또(京都)대학을 중심으로 한 일본학자들은 불교와 과정철학과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화이트헤드는 아직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정이라는 개념을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화엄불교의 '事事無碍 理事無碍'의 법계관에서, 理라는 것은 一이고 事라는 것은 多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一과 多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이나 간격도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불교의 입장으로 보면, 화이트헤드의 많은 책 속에는 아직도 이원론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에 접근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의미를 포착하게 되었습니다. 인도불교나 중국 유교.불교가 한국의 불교 유교처럼 'One become Many, Many become One'을 완전히 실현했는가 라고 물을 때, 전자는 한국의 불교 유교에 비해서 변증법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가령 불교에 있어서 一이라는 것은 부처의 마음이고, 多라는 것은 중생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분 부처님의 마음이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똑같이 있을 수 있느냐 라는 의문에 대해, 월인천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의 달은 하나이지만, 그 달은 천이나 되는 중생들의 마음에 골고루 비추어집니다. 기독교에서도 一과 多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위일체 신관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초월해 있는 신 한분이 어떻게 여러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을 수 있는가 라고 물을 때, 초월적 신이 역사적으로는 성자로도 나타나고,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존재할 때는 성령으로도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一과 多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문제는 一과 多의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삼위일체 신관을 이해할 때, 플라티누스의 일자론(一字論, 流出說)에 적용시켜서 성부를 一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성자는 정신으로 이해합니다. 성령은 인간들 마음 속에 있는 영혼으로 봅니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一(성부)은 정신(성자)보다 우월하게 됩니다. 즉 아버지는 아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게 되고,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관이 성립하려면 말 그대로 셋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힘으로나 동등해야 하는데, 서양인들의 사고로는 셋이 이미 논리상으로 위계질서가 성립해 버립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삼위일체 신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중국불교나 인도불교에서도 그러한 위계적인 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一과 多의 문제와 관계된 법장의 십문설(十門說)을 가지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당나라 때의 스님인 법장(法藏)은 중생이 부처님을 만날려면 열가지 문을 넘어야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 문열고 그 다음 문열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 열번째 문을 지나야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의상(義湘)은 화엄일승법계관(華嚴一乘法界觀)을 제시했습니다. 빨간 선으로 된 달팽이 모양의 그림 속에 260여 글자를 넣어, '一中多, 多中一'이라 함으로써 일문설(一門說)을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의 문을 설정한 것입니다.

  

 

한의 의미 ; 一, 多, 中, 同

 

이런 一과 多의 문제가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심지어 일상생활의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할 때, 이제 '한'이라는 용어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서 하나의 단어가 제일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찾는다면 아마도 이 '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이라는 말에는 먼저 하나(one)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Korean English dictionary의 사전적 의미로 보았을 때, '한'에는 one이라는 뜻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는 많다'는 의미도 적혀있습니다. '한'이라는 말이 꼭 '한'으로만 발음되는 것은 아닙니다. 음이 약간 변해서 '허''하''함''황' 등으로도 발음됩니다. 예를 들어 '하도하도 ∼'나 '허구한 날'에서의 '하'와 '허'는 많음을 뜻하는 말들입니다. 또 우리가 흔히 쓰는 '함께'라는 단어는 '같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한의 발음이 '함'으로 전용된 것입니다. 또 황소라는 단어를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누른 소이기 때문에 황소라고 하는데, 누른소라는 뜻이 아닙니다. 큰 소이기 때문에 황소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一과 多의 문제, one과 many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깊은 고민을 한 사람들이, '한'이라는 단어속에 있는 위와 같은 사전적 의미를 발견했다면,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저는 과정철학 등을 연구하면서 one과 many에 대해 계속 골똘하다가, '한'이라는 단어 속에 one과 many라는 의미가 동시에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은 한편으론 커다란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한'이라는 하나의 단어 속에 서로 반대되는, 철학적으로 Category of ultimate에 속하는 이런 말이 포함될 수 있었을까요?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one과 many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단어는 없을 겁니다. 한자에도 없으니 一과 多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잖아요. 불교에서는 '一則多, 多則一'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말도 하느님 한님이 풀어져서 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양사람들의 철학책 속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수직적으로 놓여지지, 결코 입체적으로 놓여질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신관이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아버지가 가장 높고 아들은 그 다음 높고, 우리마음 속에 있는 성령은 한 단계 더 낮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져 온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셋이 하나라는 개념을 서양인들은 형성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신학은 신의 초월성을 강조했습니다. 요즘의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같은 사회운동신학에서는 하나님의 多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서양사람들의 사고로는 一과 多가 같다는 것이 형성안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一이 多요 多가 一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또 사고방식이 그러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아주 쉬웠습니다. 기독교가 2천 년동안 해결하려 했던 삼위일체 신관 같은 것들을 한국인들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신학자들은 우리나라 안에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것에 함몰되어 서양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이해를 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앞으로 기독교 신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 이를테면 정치나 경제부문 등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으로써 정치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one을 강조하면 개체를 무시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등장할 것입니다. many를 강조한다면 사회나 국가전체는 없어져버리고, 개체를 위한 개인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법에 있어서도 一을 강조하느냐 多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실증법과 계약법으로 나누어집니다. 정치이든지 경제이든지 철학이든지 결국 모든 문제는 一과 多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선 '한'의 의미를 사전에서 어원적인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한'의 사전적인 세번째 의미로는 '가운데(中, middle)'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영사전을 펴보면, '한밤중'은 midnight, '한겨울'은 midwinter, '한여름'은 midsummer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한'은 '가운데'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용(中庸)이란 책을 보면, 天과 地 그리고 人을 묶어주는 것이 '中'이라고 했습니다. 또 불교에도 중관불교(中觀佛敎)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수(龍樹, Nagarjuna)의 삼론(三論: 中論, 十二門論, 百論)이라는 책에 근거한 종(宗)으로서, 대승불교의 한 종파가 되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여기서 一과 多를 명사라고 본다면, '中'은 하나의 관계성 즉 一과 多의 가운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一이 多가 되고 多가 一이 될려면, 一과 多가 가운데로 모아져야 됩니다. 그 다음으로 '한'개념에는 '같다(同)'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개념입니다. 서양철학사에 있어서 一과 多가 점점 벌려진 것을 '가운데'까지 오게 한 최초의 사람이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神則自然 自然則神'이라 해서, 신과 자연 즉 一과 多를 같다고 보았습니다. 서양철학이나 신학에 있어서 신과 자연이 같다고 말하면, 당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양은 의례히 中과 同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신은 창조자이고 자연(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신과 자연이 같다는 것은 피조물과 창조주가 같다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죄인과 거룩한 신이 어떻게 같아질 수 있느냐 하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처형해 버립니다.

 

서양철학사나 신학사를 쭉 들추어보면, one과 many가 同하다고 말한 철학자들은 이루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합니다. 죽임을 당하거나 쫑겨나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는 그래서 평생동안 렌즈를 깍으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또 엥하르트(Meister Eckhart)는, "내가 신을 보는 눈으로, 신도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본다. 그러므로 신과 나는 하나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 엥하르트도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만큼 서양철학은 一과 多를 극단적으로 벌려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一으로 치우쳐도 안되고, 多로 기울어져도 안되는 것일까요? 아까 얘기한대로 一에 치우치게 되면 개체 하나하나의 자유가 말살당하여 전체주의적인 체제가 등장할 수 있고, 多에 치우치게 되면 무정부상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양사람들은 헤겔식으로 一에 한번 갔다가 폐단이 나타나면 多로 가고, 多에서 폐단이 지적되면 다시 一으로 돌아오는, 소위 변증법적인 사고밖에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一과 多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가를 생각합니다. 가닥(strand)형처럼 한 가지(一)가 생기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多)가 생기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一과 多가 한 다발(bundle)로 묶여질 수는 없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양의 사고방식을 가닥형(strand form)이라 한다면, 한국적 사고방식은 다발형(bundle form)이라 얘기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 질서도 유지하면서 개체의 자유도 보장되는 그런 세계, 결국 우리는 그런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지금도 추구하고 있고요. 우리 한국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한' 속에 이처럼 一과 多와 中과 同이 포괄되어 있다는 것은, 一과 多가 동시에 일어나는 세계를 만들자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맑스가 가장 싫어한 것은 전체적이고 보편적이며 개념적인 것입니다. 맑스는 그런 것을 관념이라고 했습니다. 一을 지향하게 되면 우리는 관념론에 빠지게 됩니다. 보편적인 것에서 개체특수적인 것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원론(monism)에 빠져 버리게 됨과 마찬가지로, 一과 多를 갈라놓으면 이원론(dualism)에도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원론의 쉬운 예를 한가지 들어볼까요? 에이즈란 병이 있죠.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에이즈 발생원인을 엄밀히 철학적으로 따져 볼 것 같으면, 이것은 서양에서 남자와 여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서양에서 一은 남자였고, 多는 여자였습니다. 즉 정신적인 존재는 남자이고, 물질적인 존재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감정적 정력적 존재이고, 남자는 이성적 합리적 정신적 존재라고 나눈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한번 보세요. 그 고백론의 골자는, '정신적인 존재인 나를 유혹시켜서 타락시킨 것은, 저 물질적인 감정적 존재인 여자이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이후 여성해방운동하는 학자들은 어거스틴을 제일 못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의 성자 중의 성자를 '죽일 놈'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 서양사회에서 남자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여자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양에서는 마녀는 있어도 마남은 없습니다. 한국에는 여자무당도 있고 남자무당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럼 드라큐라는 뭐냐고 묻습니다. 드라큐라는 남자가 아니냐 하고 묻습니다. 서양에는 사탄올로지(satanology)라 해서, 악마학이 있습니다. 악마학문이 있어서 마귀에도 족보가 있습니다. 드라큐라는 악마학의 족보에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마귀족보에는 오로지 여자만 있을 뿐이지, 남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남녀가 결혼하여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람과 마귀가 같이 사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서양철학이 이렇게 여자들을 악마로 둔갑시킨 결과, 서양여성들은 자기자학을 하면서 굉장히 무서운 존재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서양남자들은 여자에 대한 공포심에 질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인간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항상 공격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까 서로간에 공포심이 생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동성연애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에이즈가 나타나게 된 것 아닙니까? 서양의 이원론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짐작하리라 생각합니다. 동양 특히 한국의 전통에서는 위와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많은 여성운동하시는 분들이 서양여성들은 의식이 강하고 동양여성들은 의식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천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서양여성들은 철저하리만치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어떻게 어필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보봐르는 그래서 Second sex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서양여성에게는 1차적인 여성 고유의 성은 없고, 남자에게 어떻게 잘보일 것이냐 하는 2차적인 성만이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이나 동양여성들이 자꾸 서양여성들 흉내를 내서 자신의 Primary Sex를 잊어버리고, 남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보일까 하는 그런 이차적인 의식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이런 얘기하면 한이 없겠습니다만, 아무튼 一과 多를 쪼개어서, 거기에 가치까지 부여하여 선과 악으로 구별할 때, 위와 같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만 무조건 통합한다면, 즉 Unisex로 만든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 나겠습니까? 창조가 나올 수 없는 혼돈 뿐이겠지요. 한쪽으로 가면 암초에 닿고 또 한쪽으로 가면 소용돌이가 기다리고 있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내용의 한부분처럼 일원론에 빠져도 위험하고, 이원론에 빠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의 의미 ; 或

 

그러므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결론은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닌, 一도 아니고 多도 아닌, 둘 모두를 부정하는 가치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라면, 엉거주춤하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一에 치우치거나 多에 치우치면 이미 결정적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뉴튼-데카르트적 사고에 의하면, 무엇이 정확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입자라 하였는데, 그것은 곧 '결정적(結晶的)'입니다. 서양학문을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확실하고 객관적인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힙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一이나 多 중 하나의 기준을 정한 뒤, 다른 하나를 배제함으로써 찾아진 것을 확실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러할진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결론은 비결정적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확률적(probability)이어야 합니다. 서양에 있어서 플라톤 이후의 분석철학자와 현대과학철학자들이 얘기하는 확률성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라는 것은 확률적이고 개연적인 것이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의 다섯번째의 의미인 '혹(或)'입니다. 우리가 '혹시'라고 할 때, 그것은 '아마도' 또는 '확실하게 생각하지 않는'이라는 의미입니다. 비결정적으로 어렴풋이 생각하는 것을 '혹'이라 할 때, 한국사람들이 '한'을 가장 많이 쓰는 경우가 '혹'의 의미일 때입니다. 여기 사람이 얼마 모였느냐 할 때, '한 백명 모였다', 여기서 서울역까지 몇분 걸리는가 할 때, '한 20분 걸린다', 또 한동안 할 때의 '한'처럼, 이같이 자주 쓰이는 '한'의 의미는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얼마동안'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한 12시에 만나자'라고 했을 때, 12시에서 15분을 전후한 시간이 '한 12시'라는 것은 한국사람에겐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Korean Time이란 말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12시에 만나자' 했을 때, 곧 정각 12시를 약속시간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개념의 차이로 인해 처음으로 미국에 이민간 한국사람들이 많은 봉변을 당합니다. 아파트에 입주할 때, 아파트 관리자들은 그 아파트를 철저하게 조사합니다. 벽의 칠의 상태, 유리창 등 하나하나 체크해 둡니다. 입주하여 얼마간 살다가 이사를 간다고 하면, 관리자는 벽의 칠 상태가 원래대로 되어있는지 확인합니다. 또 못이 없었던 곳에 박혀있으면 못을 빼도록 하고, 못이 있었던 자리에 없으면 못을 그 곳에 박도록 합니다. 한국사람들은 '한'으로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그저 들어가 사는 걸로 족합니다. 그들처럼 철저하게 조사를 하질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송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확실한 것이 어떤 개념인지를 그들의 생활단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한'을 비결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한 10분' '한 동안' '한 백명' 이렇게 말할 때, '한'을 비결정적으로 생각해야 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야 우리의 생명이 살아 숨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의 정신을 버리고서 서양사람들처럼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할 때, 우리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앞서 얘기한 에이즈나 공해 등등의 많은 문제점도 야기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결정적인 한의 '혹'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one이 many가 되고 many가 one이 되는, 一과 多가 가운데로 모여서 하나가 되고 또 생성되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플라톤의 관념론이 전체에서 개체가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보았다면, '한'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부분과 전체의 문제에 있어서, 과거의 끊임없는 부분들이 오늘과 합쳐지고(accumulation) 또 어제와 오늘이 합쳐져서 내일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한'은 과거와 오늘의 것이 합쳐진 것을 '전체'라고 봅니다. 즉 부분은 전체로 귀속되고, 전체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一과 多가 同할 때, 형성되고 계속 자라는(growing) 것입니다. 존재가 성장(growing)한다고 생각한 서양 사상가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부분과 전체는 끊임없이 accumulation되어 성장해 나가기 때문에 비결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결정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성장이 중지된 것이고 죽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으려면 비결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한국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의 비결정성을 없애버린다면, 한국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사람의 얼이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한번 보세요. 팔은 팔대로, 어깨는 어깨대로, 발은 발대로, 이렇게 몸의 각부위는 제각기 따로따로 놉니다. 그렇지만 아름답게 조화된 하나의 춤을 만들어 나갑니다. 一과 多가 조화되어 한국춤을 만든 것입니다. 또 한국음식 가운데 비빔밥이 있습니다. 서양에도 섞어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서양 비빔밥의 경우 다양한 요소들이 섞일 때, 각 요소의 맛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음식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비빔밥은 산나물, 도라지, 고추장 등등이 섞여있지만, 그 자체의 특성이 살아있으면서도 요소들이 합쳐진 전체의 또다른 맛도 만들어 냅니다. 거의 모든 한국음식은 이러한 '한'적인 음식입니다. 그래서 한식이라 하지 않았을까요! 비빔밥, 김치, 곰탕 등을 볼 것 같으면, 산과 바다와 공중에서 나는 것을 모두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입니다. 바로 비결정적이게 하는 이러한 성질의 것이 우리의 얼이요 참모습입니다. 우리의 이런 '한'적인 얼에는 고정된 실재개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풍류라고 했나 봅니다. 바람 風자, 흐를 流자, 바람과 물 모두 '밝'에서 나왔다고 했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한국사람들이 仙 佛 儒 삼교를 전부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개념이 고정된 실재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이 섞여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자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서양의 2000년 역사는, 인간사고가 합리성과 과학성을 추구하면서 조금씩 분화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분석철학이 나올 정도로, 모든 것을 하나하나 분석해 온 역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이전의 인간들은 적어도 그렇게 나누어보질 않았다는 데 포인트가 있습니다. 샤아머니즘이나 애니_미즘 같은 원시종교의 세계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동일한 관계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경우에 인간은 자연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모더니즘적 시각으로 보게 되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즉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게 되고, 자기의식이 발달되어 정신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多'가 없으면 분별력이 생기질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은 7세 이전까지는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남의 집에서 물건을 가져 오고도 그것이 자기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별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단계를 피아제(Piaget)는 전조작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이 있듯이, 7살이 되면 자기와 남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줄도 알아서 성에 대한 분별의식이 생긴다고 합니다. 철이 드는 것입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인간이 '多'쪽으로 기울어져 사물을 다양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一에 치우쳐 일원론에 빠지게 되면, 무분별 상태와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자연과 인간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공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一이 多가 되고, 多가 一이 된다'는 것처럼 비결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일원론과 이원론을 극복 지양하여 종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켄윌브 같은 학자는 一의 상태를 전분별의 상태, 多의 상태를 분별의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一과 多를 분별하면서도 '一이면서 多이고, 동시에 多이면서 一이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것을 초분별 의식(Free-Diferenciation or Transpersonal Psychology)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초(超)'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일원론과 이원론의 어떠한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 우리의 삶이 살아 생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구조를 알아 보았습니다.

 

 

 

한의 문명사적 의미

 

그러면 이제 '한'이라는 말의 어원을 여러 다른 문명권과 관계시켜서 살펴 보겠습니다. 육당 최남선은 '밝'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세계문명권 도처에 '밝'사상이 과연 어떻게 퍼져 있는가 라는 것처럼, 이와 비슷한 각도에서 한의 개념을 찾아 보겠습니다. 이 내용은『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이라는 책에 나와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몽고에서는 모든 신의 이름에는 반드시 '칸'이 붙습니다. 버마사람들은 최고신을 '팟햐(Pot Hian)'이라고 했습니다. 버마민족 중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민족이 친족인데, 그 친족 밑에 위치한 카친족은 최고신을 '허한'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프리머티브하거나 오리지널한 민족 또는 산악민족들을 전세계적으로 조사해 보면, 그들 민족의 신의 이름은 예외없이 '한'입니다. 그 다음 타이랜드에도 '콰한(khwan)'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 사람들의 '콰한'의 개념이 '혼'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홍콩에서 있었던 종교학회 발표에서 제가 '한'은 一과 多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했을 때, 타일랜드에서 온 모 교수가 자신들의 '콰한'의 개념을 한국의 '한'개념과 가깝게 본다고 했습니다.

 

또 인도네시아에는 종족이 많고 여러 종교가 잡다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 판차실라에서 인도네시아 전체를 하나로 묶는 종교를 발표했습니다. 그 때 그것을 '커투한(ke-Tu-Han)'이라 했습니다. '큰 주 하느님'이란 뜻인데, 우리말과 좀 비슷하기도 합니다. 필리핀에는 이고르트라는 원주민이 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말에 '아마(Ama)'와 '이나(Ina)'가 있습니다. 아마는 아버지란 뜻이고, 이나는 어머니란 뜻입니다. 여기서 '아마한' 하면 할아버지란 뜻이 되고, '이나한' 하면 할머니란 뜻이 된다고 합니다. '한'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명사에 한을 붙이면 복수의 개념이 되는데, 가령 '소한'하면 '소들'이라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형용사에 한을 붙이면 최상급이 되어버립니다. 가령 '아름다운 한'하면 '가장 아름다운'이란 뜻이 됩니다.

 

이슬람교의 알라신이 가지고 있는 99개의 속성 가운데 '한'이라는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자비 사랑 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인도에 산탈족이 있습니다. 드라비다 원주민이 아리아족에 쫑겨서 깊은 산 속에 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산탈족이 한 백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산탈족의 창조신화를 보면, 인간이 새로 하여금 알을 깨게 하는데, 그 새의 이름이 '한스'와 '한신'이었습니다. 이런 등등이 많이 있습니다. 이상은 '한'과 다른 언어와의 뿌리를 통해서 제가 찾아 본 것들입니다. 또 우리 역사상에 있어서 나라이름을 보면, 고조선 이전에 석유환국이라 해서 환국이 있었고, 고조선이 망할 때 준이 나라이름을 한이라 했고, 뒤에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이 생겨났고, 해방 후에 북에서는 조선을 남에서는 한을 각각 국호로 써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민족통일을 했을 때, 위의 개념들이 통일조국의 국호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야겠습니다.

 

이제 여러 면에서 우리민족은 '한'을 우리의 정신적인 주축으로 삼아야 합니다. 철학적인 개념이 역사의 뿌리와 관계될 필요가 있느냐 하며 그런 국수주의적인 발상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저는 철학적인 개념이 그저 공중에 홀로 떠있을 때보다 역사적인 유래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서구문명사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슈메르문명입니다. 그 슈메르의 최고신이 '안(Han)'입니다. 보통 H발음은 모음 앞에서는 없어지기 때문에, 슈메르의 '안'은 우리의 '한'개념과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접으며

 

지난번 수원에서 통일관련 학술세미나가 열렸을 때, 많은 분이 모였습니다. 그 때 이대 박 교수와 문익환 목사, 그리고 저 세사람이 공통된 하나의 발표를 했습니다. 그 때 문익환 목사도 앞으로 우리가 통일을 이룩한다고 했을 때, 그 통일이라는 것은 단지 한반도만의 통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온 인류가 하나의 뿌리, 한가족으로 돌아가는 그런 의미로서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민중사관으로 통일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때 현장에서는 문명사적 입장에서 우리의 통일을 내다보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문명사적으로 볼 때, '한'을 통해서 온 인류가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을 끝으로 드립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구조, 즉 nonmonism nondualism이라는 비결정적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21세기를 향한 우리의 민족철학과 인류정신사가 나아가야 될 방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약 력

연세대 신학과 졸업, 동 연합신학대학원 수료 성균관대 대학원 수료 美 필립스대 철학박사

저 서

한철학, 한사상, 한사상의 이론과 실제,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 현대물리학과 한국철학, 카오스와 문명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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