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보천교보천교운동과 동학(東學) [1]

작성자: 상생동이님    작성일시: 작성일2018-08-09 14:02:55    조회: 3,276회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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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운동과 동학(東學)


안후상 / 역사연구가


일제하(日帝下) 자칭 6백만 민중을 조직했다는 보천교(普天敎). 당시 전 조선의 인구는 1600만명 정도.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조선민중의 절대다수가 관련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식민 치하에 쪼들려 살으며 설움받아야 했던 민초들의 절박함을 아우르고 담아낸 거대한 조직 보천교. 이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동학(東學; 天道敎)과 보천교와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의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다.



보천교운동이란 ?


보천교는 1910년대, 본명이 윤홍(輪洪), 관순(寬淳)이라고도 하는 차경석(車京石, 1880∼1936. 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生) 이라는 인물을 정점으로 한 60방주(方主) 조직(초기 24방주제)을 말한다. 그 조직의 목적이 뚜렷하고, 그 활동 역시 식민지 사회에 적잖은 파급을 몰고왔다는 데서 '보천교 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 일명 대흥리(大興里)에 본소(本所)를 두고 조직을 확대하니, '국권회복' 과 '천자등극'을 염원하는 '태을주(太乙呪)'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주송수련은 동학농민전쟁과 한일합방 등으로 갈가리 찢기워진 민심을 달래고 통합하는 지대한 효과를 낳았다. 이에 깜짝놀란 것은 일제였다.


지난 동학농민전쟁 당시 수천 수만의 농민군이 외우며 하나같이 단결하던 그 시천주(侍天呪)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일관헌과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1922년,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구속된 60방주의 한 사람인 이상호를 극력 회유하였다. 조직의 정체를 명확히 하게 되면 관(官)의 보호를 받을 수도, 종교로서 행세할 수도 있다고 그래서 이름을 '보천교'로 등록, 종교 유사 단체임을 세상에 공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보천교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불리워지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태을교'나 '훔치교' 또는 '선도교(仙道敎)'라 불리웠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교명 등록과 동시에 이전의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운동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보천교 조직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일경의 집요하고도 교활한 탄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보천교운동 탄압의 실체와 물산장려운동


그 탄압의 실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반란죄나 보안법 또는 사상범으로 몰아 구속, 고문하는 등의 물리력 사용이 그것이다. 둘째는 조직과 그 행위를 사교집단(詐敎集團)이나 미신으로 매도하여 근대 교육을 받은 자나 사회 주도층으로부터 질타와 외면을 받도록 하였다는 점. 그리고 반인륜적이고도 비민족적인 집단으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낳게 하고 조직을 민중으로부터 괴리시키려 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조직의 내분을 격화시켜 운동의 역량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 등이다. 일제의 이러한 책략에 철저히 이용된 것은 당시 언론들이었다. 그 탄압의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제주 중문 법정사 항일봉기 :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한일합방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소된 간부 수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십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천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 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 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간부 수십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천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쨓든 조직으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다. 일경에 의해 보천교 조직원이 사살된 사건이 전남 고흥에서 발생하였다. 교집회에 일경이 나타나 이를 해산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교인 한 명이 죽고 나머지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집단으로 항의를 하는 교인들을 일제는 보안법으로 구속해버렸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사회 문제화되었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사건 초기에는 경찰의 집회 해산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미신, 사교 집단의 우매한 종교 행위가 더 큰 문제라고, 논조의 흐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조직을 파괴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일제는 보천교 조직을 미신·사교 집단으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독립운동자금으로 교금 지원을 한 사례 :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던 김철수(金綴洙)와 당시 동지였던 장덕수, 최팔용 등은 보천교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왔다. 기미독립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익산 금마의 임규(林圭) 역시 보천교의 자금 지원과 관련이 있다.


더 나아가 상해 임시정부 요인 조만식(趙晩植 ; 개신교 장로 曺晩植과 다른 인물)은 한때 보천교 본소에 거주하면서 교단의 수호사장(외교담당차석)으로 활약하였다. 이때, 교간부였던 한규숙, 정봉규, 정상택 등과 권총 두 자루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조만식은 1년 6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1931년 신의주도립병원에서 병사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은 보천교운동의 일환으로, 정읍에서 촉발 : 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물산장려운동. 그러나 외산 물품 배격과 자급자족운동은 당시 보천교운동의 일환이었다. 시작의 공간도 정읍 대흥리. 특히 교의 수위 간부 이상호와 이성영(정립이라고도 함. 당시 정읍시 진산리에 거주)의 아우인 당시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수였던 이순탁(李順鐸)은 1923년 1월에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창립발기인 겸 이사로 활약하였다. 이외, 교간부인 임경호, 고용환, 주익(朱翼), 이득년 등은 이 회의 이사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고용환은 1923년 5월 물산장려회가 소비조합을 설립하였을 때 5인 설립준비위원이 되었다.


보천교 경성진정원과 보광사(普光社)는 물산장려회 기관지인 <산업계(産業界)> 창간호에 축하 광고를 게재하였으며, 특히, 고용환과 임경호가 <산업계> 운영담당자가 되는 등 사실상 보천교에서 이를 운영하였다. 1920년 전후해서 이미 대흥리에는 광목과 면포를 생산할 수 있는 직조 시설이 들어섰다. 염색도 자체적으로 했다. 농기구와 일반 경기계 제작 기술도 들여와 공장을 설립, 가동하였다. 상가도 지어 교인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리 옷, 우리 물품 쓰기 운동을 벌여 나갔다. 외산물품 배격은 곧 외세 배격과 같은 것이며 이는 곧 국권회복의 지름길이라고 설파하였다. 이외, 민립대학설립도 추진하였다. 당시 민립대학기성회에 보천교 간부 다수가 참여하였다.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와 경무국장 아사요시(淺利)의 정읍의 교본소 방문 : 1926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로(齋藤實)와 1928년 경무국장 아사요시(淺利)가 정읍의 교본소를 방문하였다. 이 사건은 대외적으로 여러 가지 추측을 낳게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조선총독을 대신해 보천교의 차경석이 조선을 대리 통치할 것이라는 억측이었다. 이는 그 동안 들끓었던 '천자등극설'을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가설로 발전하였다.


이를 두고 반기는 쪽과 비민족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쪽이 있었다. 아무튼 대리통치든 천자등극이든 당시 조선총독이 차경석을 면담하였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능히 당대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이 일로 교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까지도 암울한 시대에 유일한 대안이요 의지처로 보천교운동을 의심치 않았다


1929년 '삼광영봉안식(三光靈奉安式)' 불발 : 총독의 교본소를 방문하여 차경석을 면담하고 돌아간 사실이 조선의 천자(天子)될 차경석을 총독이 배알(拜謁)하였다는 억측으로 나돌자 교조직은 순식간에 복원되는 듯했다. 이로써 정읍 대흥리에 진행되고 있던 어마어마한 교본소 신축 역사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운동(국권회복운동)은 급속도로 약화되어갔다. 그렇다고 일경의 탄압이 중지되거나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무국장의 잦은 차경석과의 면담은 식민지 사회 지식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교본소 신축 대역사 역시 민중들의 실의를 부추겼다.


결국, 총독의 교본소 방문과 경무국장의 잦은 차경석과의 면담 등은 보천교운동을 민중과 괴리시키려는 일제의 고단위 책략임이었음이 밝혀졌다. 내부 분열과 민심이반은 다시 이어졌고, 여기에다 지식인들의 비난이 거세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교핵심부에서는 어떤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것은 경복궁에 버금가는 교본소 개원식의 일환인 십일성전(十一聖殿) 내 '삼광영봉안식'을 성대히 치르는 것이었다. 이 행사는 곧 '천자등극식(天子登極式)'으로 세간에 알려지면서 교운동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경무국 산하 특수경찰대를 급파하여 행사를 원천적으로 막았다. 그래도 행사를 강행하려는 간부 40여 명을 긴급 체포, 내란죄로 처벌하였다. 이를 '보천교의 옥새(玉璽)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교본소를 급습한 경찰에 의해 등극을 준비하는 과정의 '인장'과 '조각명단'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운동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영변·희천 사건과 강원도 평강 비밀결사체 발각 사건 : 1936년 평안북도 희천(熙川)과 영변(寧邊)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비밀결사체가 발각되었다. 이 결사체는 다름 아닌 보천교 조직이었다. 보천교의 조직운동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을 시기에 잔당(殘黨)에 의해 국권회복 움직임이 있어왔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같은 해 강원도 평강에서도 잔당인 일명 선도교(仙道敎)에 의한 국권회복운동이 발각되어 관련자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파장은 당시 총독부에 직보한 평강경찰서의 비밀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보천교의 조직운동이 다시 재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긴박한 우려 속에서 관련자 전원을 경성으로 압송하여 재판을 진행시키기도 하였다.


1936년 차경석의 죽음과 교본소 해체 : 1936년 3월 교주격인 차경석이 타계하였다. 이로써 해방되기까지 약20여 년 동안 국권회복문제가 국내에서만큼은 더 이상 제기되지 않았다. 때론 전면에서 때론 비밀결사체로서 국권회복을 암암리에 도모했던 보천교운동은 차경석의 타계로 인하여 그 운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보천교운동의 소멸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규모나 미적(美的) 가치로보아 당대 최고라는 교본소의 십일전(十一殿)을 비롯한 50여 채의 군소 건축물들도 함께 운을 다했다. 차경석의 타계 즉시 교본소 건축물들을 전면 해체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유사종교라고 불리우는 민족종교는 물론, 기성종교의 활동에까지도 제약을 가해졌다. 차경석 사후 불과 3개월도 채 안 된 그해 6월에 '유사종교(類似宗敎) 취체 강화책'이 발동되었고, 이어 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이 공인종교 통제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정책이 발동되었다.


보천교운동과 동학 보천교 관련 인물들을 보면, 핵심 인물 다수가 동학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차경석의 나이 15세 때, 부친 차치구(車致九, 貫은 延安, 이름은 重弼. 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生)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정읍의 농민군을 일으킨 농민군 내 핵심 사령이었다.


패퇴하는 전봉준을 순창까지 호위하고 돌아온 차치구는 관군에게 잡혀 흥덕 관아에서 분살형을 당했다. 1898년 겨울, 흥덕에서 시작되어 불과 몇 달만에 정읍과 고창 일대가 봉기군에 의해 장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음 해인 1899년 여름까지 봉기가 전쟁으로까지 번져, 전라도 중서부 일대가 다시 한번 참상을 겪어야 했다. 동학의 잔당들이 주도한 것이다. 지금의 정읍시 이평에서 조직된 영학계(英學契)에서 출발한 봉기는 그래서 '영학당의 난' 또는 처음 흥덕관아를 습격하였다해서 '흥덕 민란'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바로 이 전쟁에 차경석이가 참여하였다. 고창성을 함락하고 전주성으로 곧바로 진격한다던 봉기군은 고창성 전투에서 그만 패퇴하고 말았다. 차경석은 체포되고, 이후 형(刑)을 기다리던 장성감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다. 이후 동학의 일진회(一進會)에 적극 가담하면서 일진회 전라남북도 순회관(巡回官)까지 지낸다.


일진회의 왜곡된 운동에 불만을 품던 그는 조직에서 나와 암울했던 민족의 운을 염려하면서 주유(周遊)하던 끝에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지금의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生)을 만난다. 강일순의 24 수위 제자들은 거의가 동학농민전쟁에 깊이 개입하였거나 동학과 관련한 인물들이다.


동학농민전쟁 이후에도 동학운동은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촉발시켰고, 이후에도 민족의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강압적이고도 교활한 일제의 책략으로 말미암아 일부 운동이 왜곡되었고, 이에 실망한 민중들은 다른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사회운동의 일 주체로 급부상한 증산과의 만남에서 파생된 보천교는 민중에게 희망을 일제에게는 경계를 가져다 주었다. 당시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던 동학과 비견될 만큼 성장한 보천교.


동학 관련 <개벽(開闢)>지(誌)나 <동아일보> 등에서는 당시 보천교를 사교(邪敎)라고 비하하였다. 바로 조선 내 사회운동의 헤게모니를 잃지 않으려는 동학 측의 우려라고 볼 수 있다. 보천교 역시, 동학의 <개벽>지와 맞설 수 있는 기관지 <보광(普光)>지를 창간하였고, <동아일보>와 쌍벽을 이루던 당시 일간지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업을 주도한 이는 당시 동경 유학을 했던 간부 이성영에 의해서였다.


동학과 보천교의 성격 이처럼 그 맥이 같고 운동의 목적이 같으매, 서로 경쟁하듯 경주하며 식민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온 두 조직체. 특히 사회 갈등을 통합하는데 주송수련을 이용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삼아 불합리한 사회와 민족 모순을 타파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보천교와 동학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넌센스 같은 무모함일런지 모르나 당시만 하여도 현실적인 대안으로 작용하였다.


그 한 예로, 정읍 대흥리의 교집회에 사용될 식권 45만장을 보천교에서 발행하였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말하여 주듯, 당시 민족 문제로 이처럼 많은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조직은 보천교, 오로지 보천교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하의 동학운동은 민족과 사회 모순을 서서히 극복해나가려고 하였다. 이는 조직운동으로서의 동학보다는 종교제도화(宗敎制度化)한 천도교(天道敎)로서, 이미 기성화돼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취약해진 동학운동의 틈새를 비집고 등장한 게 바로 보천교운동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천교운동은 동학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라고 볼 수 있다.


이 둘은 식민지 사회의 통합을 통한 민족의 독립을 도모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종교화된 조직체를 활용하였다는 점 또한 같다. 당시 동학이나 보천교가 갖는 대(對) 사회적 기능은 사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참여나 제도나 정치의 불합리함을 개선하려는 의지의 대안적 개념으로서의 종교였다. 당시 일본 종교나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원불교나 불교, 개신종단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는 뜻이다. 한 예를 들자. 요즘 교세가 큰 몇몇 기성 종단에서는 자교사(自敎史) 연구에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항일로 볼 수 없는 부분을 침소봉대하여 교단 전체가 민족운동에 뛰어든 양 견강부회한 부분도 없지않다.


하지만, 기성종교의 항일 이력은 그것을 모두 합쳐도 당시의 동학이나 대종교 그리고 보천교의 항일 이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니, 보천교의 항일 이력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의 치부를 감추거나 이를 만회하려는 기성종단들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일제 하 공인종교와 동학과 보천교를 대표하는 비공인종교의 성향이 본질적으로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아뭏든 동학운동이나 초기 보천교운동은 분명 기성종교화 되기 이전의 일이다.


조직 체계와 그 조직을 통한 사회 참여를 시도하려하였던 예가 말하여주듯, 사회운동의 수단으로서의 종교 조직이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동학이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사회운동 세력이 종교화한 것이라면 보천교는 동학운동의 거듭된 실패에 따른 반성을 배경으로 형성된 사회운동화한 종교 조직이었다고 본다. 동학 운동의 주도자였던 핵심 차경석의 행로가 이를 잘 말해준다.



 

글쓴이: 안후상(安厚相) 1963년 정읍 진산리 생(生). 호남고와 원광대 사학과를 졸업. 성균관대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 전 목아박물관 학예연구관. 현 한국종교사회연구소와 보조사상연구원에서 한국종교사를 공부하고 있다. 발표 논문으로는「일제하 보천교운동 연구」(『남민』서해문집), 「일제하 보천교 탄압사례」(『일제의 한국민족종교 말살책』고려한림원), 「제주법정사 무오 항일항쟁 연구」(『종교학 연구』서울대학교), 「보천교연구의 현황과 과제」(『한국종교사연구』한국종교사학회),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증산 강일순의 생애와 사상」(『문화저널』문화저널사)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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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작성자: 재우스님     작성일시:

당시 조선민중의 절대다수가 관련이 있었음